“대부분의 스포츠 공간에서 여성들은 침입자로 여겨진다. 코트의 ‘주인’들은 침입자인 나에게 “왜 농구를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나는 침입자로서 대답하기보다 코트의 주인으로서 대답하곤 했다. “여기는 내 홈코트인데?” “너 몇 기냐?” 따위의 대답으로 질문을 조롱하는 것은 피곤한 감이 있어도 대체로 재밌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이 순진무구한 것은, 질문자가 평소 행실 바른 착한 청년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스포츠에서 배제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리듬을 깬 침입자에게 향하는 질문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무감각의 언어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좋은 대답이 가능하긴 할까?”
--- p.39~40
“농구를 하며 새삼 알게 되는 것은 농구 하는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을 굳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모두가 알지만 그럼에도 종종, 자연스럽게 없는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농구 하는 여자’가 새삼스러운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들 ‘농구 하는 여자’들은 ‘농구 하는 남자’를 기준으로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물론 각자가 겪는 압박의 강도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 어떤 공간에 속해 있는가, 어떠한 경험을 자신의 타임라인 안에 주요하게 배치하고 기억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나처럼 끊임없이 저항을 느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압박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스스로 내면화하기도 한다.”
--- p.50
“아마추어 여자 농구판에는 나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농구를 하는 사람부터 엘리트 농구를 계속해왔던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이 있다. 직업도 다 다르다. 언뜻 보기에 이곳은 각자 다른 배경과 경험, 조건들을 가진 사람들이 단지 농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여 공놀이를 하는 평화롭고 평범한 곳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여성이 스스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스포츠계의 구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나이에 따라서 정해지는 호칭과 권력 구조, 할 말이 없지만 집에 가지 않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 고기를 많이 먹는 것, 팔씨름을 아무 데서나 하는 것(힘자랑을 자주 함), 힘이 약하면 (여자들끼리 모여 있는데도) 여자 “같다고” 놀리는 것, 머리가 짧으면 남자라고 놀리는 것, 여자가 어쩌고 남자가 저쩌고를 자주 말하며 역할을 강요하는 것 등.
어떤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킬조이kill-joy로서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것에 한계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나는 계속 문제의식을 던지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뒤풀이에 가서 술을 궤로 마시지 않으면 너랑 이제 놀지 않겠다고 애정 넘치는 으름장을 놓는 사람에게 “언니 너무 한남 같아요”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 말고도, 재미 없는 말에 웃지 않거나 굳이 정색하거나 화낸다. 나 같은 애가 팀에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체대 꼰대가 얼마나 촌스러운 것인지 알아간다. 무심한 행동과 말들에 사실 너와 내가 모두 상처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을 눈치채고, 눈치 보게 한다. 솔직히 잘 안 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떤 것이 공동체를 살아남게 하는지, 건강하게 지속시키는지 함께 방법을 찾아나가는 중이다.“
--- p.65~66
”여성들만의 운동 영역으로 스스로를 분리하는 움직임은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소하고 운동을 시작하는 여성들에게 진입 장벽을 낮춰주기 위한 것이겠지만 일상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소리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여성들에게 운동을 권유하는 흐름, 운동을 위한 여성들만의 공간 수요의 증가가 강남역 살인사건의 맥락과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은 수많은 사건들에 반응하고 가치 있는 움직임을 추동해왔다. 하나의 사건 또는 의제 안에서 뒤엉키는 사회적 맥락과, 여러 차별 요소들과 마주하면서 일어나는 정동들은 신체의 반응을 불러왔다.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신체 능력을 위한 운동에 대한 요구는 교양 쌓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짓이자, 안전한 공간에 대한 요청이다.“
--- p.84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츠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훈훈하고 뻔한 깨달음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면 “패배와 실패의 경험은 우리 팀에게 스포츠의 불확실성을 가르쳐주었고, 어떤 상대를 만나도 절대 방심하지 않는 긍정적인 역량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 나를 포함한 우리 팀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히려 불어난 불안감, 낮게 흐르는 긴장감이었다. 연습과 훈련으로 그 정도를 가라앉힐 수 있을 뿐 결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했다. 더 나은 플레이와 순간들을 위해 언제 어디에서나 튀어나오고 마주칠 수 있는 사건을 견디는 것, 그것을 힘으로 전환하고 공유하는 방법을 예측하고 반복하는 것. 우리 팀이 얻은 것은 농구 코트는 불확실성의 생생한 현장이라는 감각이었다.“
--- p.166~167
”소녀 되기에 실패한 아이는, 소년 되기에도 실패한다. 객관화되어 있는 것들은 쉽게 미끄러지고 규칙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은 낯설지만, 미끄러짐은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여름의 불쾌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놀이들로 이어진다. 어릴 때는 불안정한 삶들이 부러웠다. 이사를 많이 다니는 것, 집에 늦게 들어가도 되는 것, 손가락이나 목에서 우두두둑 소리가 나는 것, 소풍 갈 때 김밥 대신 유부초밥 싸오는 것,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것, 안경을 쓰는 것. 부러운 것들을 가지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면 그건 나쁜 것이라고 했다. 여유가 없거나 외롭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삶의 지표이건 아니건, 당시 내가 불안정한 것들에 진심으로 매료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동경했던 것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삶의 질서를 지키거나 어기는 방법을 몰라도 오히려 나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가치 있는 것들에 이끌리는 힘이 뛰어나다고 믿는다. 불안정한 것들은 늘 새로운 것들을 발생시킨다.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가진 실패하는 힘과 지속되는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규칙들을 믿는다. 그래서 지금-여기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는 중이다.“
--- p.177~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