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업힌 은록이 자꾸 버둥거렸다. 한 손으로는 업힌 그녀의 엉덩이를 바치고 있고 나머지 손으로는 막대기를 잡아 움직이니 자세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모달이 막대기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다리를 다친 후 처음이었지만 손이 자유로워지자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은록을 대신 잘 잡을 수 있게 됐다. 그는 그걸로 만족했다. 아픈 다리의 고통은 잠시 접어 두고 그대로 걸었다. “나도 성질 많이 죽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방금 전 일을 생각하며 그가 피식 웃었다. 은록이 많이 취했는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칭얼거렸다. “세 번째는 싫어.” “두 번째지. 어찌 세 번째냐?” “두 번째고 세 번째고 전부 싫어.” “봐 줘라. 네가 싫다 하면 난 어쩌라구. 사별한 홀아비로 평생 살까?” “알게 뭐야. 내 신은 어딨어? 이놈, 신을 어쨌느냐?” 오랜만에 주인의 말투로 그녀가 떨어질 듯 바닥을 휘둘러보며 갑자기 신을 찾았다. “어어? 그리 목을 빼고 보지 마. 떨어져.” “신발이 없어 그러질 않느냐? 네가 훔쳐 갔지?” “그깟 신 훔쳐 뭐한다고.” “노비란 것들은 종종 주인의 비단신 훔쳐다가 엿 바꿔 먹고 그러잖아. 아니야?” “아니다.” “이놈 보게. 아니라네. 아니라니? 아닌 게 아니지 않아?” 은록이 뒤에서 그의 머리통을 얼굴로 받았다. 뒤통수가 띵했다. 함께 지내다 보니 성질부리는 것도 닮아 가나 보다. “아, 좀. 가만히 있어! 처음부터 신 안 신겨 줬는데 무슨 신 타령이야?” “그래?” “그래!” “어찌 말을 하지 않고 비밀로 했느냐? 혼날까 두려웠어?” “그래! 그래서 관뒀다. 됐냐?” “괜찮다. 난 널 혼내지 않아. 내가 너를 왜?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다 나한테 말해. 내가 다 혼내줄 테니.” 그러면서 취한 은록이 그의 등에 얼굴을 비벼댔다. 딱하고 가련하다. 착하고 장하다. 기특해서 좋아. 모달이 최고야. 제일 좋아.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래. 나도 네가 좋다. 한결같은 마음 가진 네가 좋다. 그래서 마음이 타들어 간다. 내 이런 너를 두고 어찌 갈까 싶어서.” 혼자라도 떠날 생각이다.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질기게 살아남아 혼자 북상하기로 결심했다. 막대기를 버리고 다리 운동에 집착하는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날이 되면 발이 떨어지려는지 모르겠다. 듣고 있어?” “으응.” “지금은 내 처지와 상황이 여의치 않아 헤어지지만 말이야. 나중에, 아주 나중에 상황이 나아지면 그때 함께해도 되지 않겠냐. 사람 마음만 그대로라면 말이야.”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데리러 올게, 기다려 볼 테냐?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전쟁이 끝나고 내 용좌에 올라 북궁이 안정되면 꽃가마 한 채 보낼 테니 그거 타고 나 만나러 올래?” “으응.” “아주 길 거야. 몇 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어. 그래도 괜찮아?” “으응. 괜찮아. 다 괜찮아.” “약속한 거다?” “으응. 약속. 나 물. 목말라.” “목마르냐? 오냐. 아씨가 목마르다니 당연히 떠다 드려야지. 돌아가자. 가서 시원한 물 먹고 푹 자자.” 모달이 어린아이 업은 것처럼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며 기방으로 돌아왔다. 축 늘어진 그녀를 내려놓고 물을 떠와 마시게 한 후 이불을 깔아 주고 편히 눕혔다. “이리 보고 있으니 목숨 바쳐 살린 게 하나도 안 아깝구나.” 술에 취해 붉어진 볼이 혹시 더워 그런 건 아닐까 손부채질까지 해 주는 모달이 반듯한 은록의 이마를 손으로 쓸어 만지며 말했다. “너무 예뻐.” 어디선가 노랫가락 하나가 기방에 울려 퍼진다. 잠들지 못한 어느 기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는 쉰내 나는 막걸리처럼 끈적하고 술에 취해 음도 틀리고 가락도 맞지 않는다. “맨몸으로 태어나 버텨낸 것이 이곳이라네. 눈물이 흐르는 건 그것 때문이지. 이것밖에 못 해낸 게 못내 억울해서. 여기까지 온 게 내 탓만 같아서.” 열심히 살아왔는데 앞을 보니 막다른 길이다. 누구보다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속도 모르고 사람들이 조롱하니 하소연할 곳이 없다. 내 노력 알아 줄 이 누구인가. 서러워 눈물만 난다. 모달은 노래를 들으며 은록의 옆에 누웠다. 밖으로는 자장가가, 안으로는 달빛이 비춰 들어오니 비좁은 쪽방도 더없이 풍요로운 느낌이다. 모달은 곯아떨어진 은록을 가만히 품에 안으며 이 평화가 부디 오래가면 좋겠다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본문 중에서
이 시대. 지상 위에 무수한 나라들이 존재하는 현 시대. 북쪽에는 광활한 대지를 다스리는 북나라가 있고 그 아래에는 위계가 명확한 귀족의 나라 가령국이 있다. 가령국이 자리한 서쪽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여러 나라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무역으로 영화를 누리는 인수산국이 있는데, 그곳은 지혜와 탁월한 상술만 있다면 누구라도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신분 여하를 막론한 자들이 새로운 꿈을 가지고 발을 들이는 곳이다. 동쪽의 바다 건너에는 1개의 대국과 8개의 이름 모를 소국이 있다. 그중에는 북나라의 속국인 명인국이 포함되어 있는데 대대로 북나라를 모국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남쪽은 풍요한 기후와 기름진 옥토로 내전과 전쟁이 없는 성을국이 하늘의 은혜로움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다. 그중 모든 나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인수산국. 명성만큼이나 화려함을 뽐내는 인수산국의 수도 경원에는 수많은 상단 중 하나인 새랑전의 주인 이형산이 살고 있다. 혈혈단신의 몸으로 인수산국에 건너와 이제는 매일 장이 열리는 대로변에 열 개의 가게를 소유하고 있는 그는 상단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는 호위무사를 스물이나 데리고 있어 그 바닥에서도 나름 유명세를 떨치는 인물이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이 약해지고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온기가 서서히 상승기를 타는 초봄의 어느 날. 이형산의 집 앞마당엔 아침부터 낡고 허름한 차림의 사내 하나가 숨어 들어와 소란을 피우느라 시끄러웠다. 뒤늦게 사내를 잡은 하인들이 그와 몸싸움을 벌이느라 흙먼지를 일으켰고 급기야 소란을 들었는지 결국 비단 이불 속에서 곤히 자던 이형산이 기어코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놈! 이 천하에 사기꾼 같은 놈! 당장 내 딸을 찾아내라! 내 딸을 어디의 유곽에 팔아 치웠느냐, 이노옴!” 사내는 이형산을 보자 용기 있게 소리부터 질렀다. 하인들에게 양팔을 붙잡혔지만 저 멀리 보이는 이형산을 향해 발길질까지 날리며 기세등등하게 쉬지 않고 고함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