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인간과 사회,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성과 성행태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역시 문제가 된다. 물론 이런 질문들에 대해 정해진 답은 없고, 신학적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아무리 다양한 견해를 인정한다 해도 토론을 하려면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의 기준점이 있어야 하며, 그 최소한의 기준점이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로부터의 탈피라고 말한다.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에 매여 있는 한 실질적인 토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p.17
하느님의 진리는 인간의 불완전한 생각과 지식을 통해 알려지고 표현되고 기록되었다. 성서는 그것이 기록된 당시의 삶의 자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음성은 그 시대의 소리로 들려진다. 따라서 성서의 기술을 문자 그대로 사실, 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문제와 관련해서든 모든 기독교적 인식과 토론의 출발점이며, 실제에 대한 단순 명료한 사실적 인식에 속한다.
--- p.17
사실 성소수자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논증하는 것 자체가 우습고 가당찮을 수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받아들일지 말지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성소수자 당사자에게는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리라는 염려가 내 마음속에 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성소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썼다는 말로 변명을 삼고 싶다.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덜고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의도가 컸다.
--- p.20
오늘날 한국에서 개신교는 사랑의 종교, 화해의 종교라기보다는 증오의 종교로 인식된다. 그러나 본래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배제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포용의 대상을 확대해가는 것이 복음의 본질에 속한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친구로,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함께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던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과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 pp.85~86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위기는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하느님의 축복을 동일시하고 물질적 성공과 풍요를 복음과 맞바꾼 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제 경제성장이 멈추고 성장의 비용을 치러야 할 시점에서 개신교의 ‘번영신학’은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해악이 훨씬 두드러진다. 이제 교회는 그동안 번영신학을 추구해온 데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 p.87
예수는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자기혐오를 강요하고, 그를 죽음으로 밀어넣을 수 있는가? 예수는 사람들에게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죄인으로 낙인찍을 수 있는가?
--- p.101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한다.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입히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신다. 예수는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인상 깊게 설파했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사람 자신인 것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
--- p.102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람이 미워할 수는 없다. 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죄이다. 하느님은 증오와 배제가 아니라 사랑과 화해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 p.102
인간의 성에 대한 성서의 이해와 거기 근거한 신학적 견해 역시 그 시대의 한계 안에 있으며, 따라서 제한적이다. 이러한 제한적 이해에 비해 ‘앎과 이해에 근거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성서와 신앙의 근본에 속한다. 그리고 앎과 이해에 근거한 성서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서 본문만이 아니라 오늘의 경험을 끌어와야 한다. 성서와 오늘의 경험, 이 둘을 함께 끌어오는 것, 그것은 앎과 이해에 근거한 성서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진리에 헌신하고 거기 입각해서 기꺼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이것은 성서와 과거 신학이 전제했던 인간의 성에 대한 생각은 이후 사람들이 인간의 성에 대해 얻게 된 지식과 발견을 통해 보완되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p.135~136
기독교는 이성애만이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른 유일하고도 지배적인 인간 성애의 형태라고 규범화함으로써 다른 성애의 형태들을 억압하는 데 일조했지만, 기독교에 의해 이루어진 이 과정 역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다. 따라서 성소수자 문제에 접근할 때에는 인간의 성애, 특히 이성애를 영원한 신적 질서, 또는 하느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자연의 질서’로부터 끌어내려 ‘시간의 질서’ 속에서, 역사 속에서 그 성-정치적 작동기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 p.158
격렬한 변화의 시대에 가족관계와 성 관념 역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일부일처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고, 다양한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인정하라는 요구 역시 세계적으로 눈에 띄게 강력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이성애건, 동성애건 새롭게 정의될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절박한 갈구를 드러낸다. 자의든 타의든 이 거대한 생태적ㆍ사회경제적 변화의 물결 속에서 사랑 역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며, 자유로운 사랑을 인정하는 변화의 방향이 생태적으로도, 사회경제적으로도 올바른 방향의 변화이다.
--- p.178
문자적 성서해석은 실제로는 성서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들의 편견이나 혐오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경우든 성서를 내세워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것은 그 자체가 성서에 대한 배반이다. 우리는 성서가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시대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올바른 답변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단 의심해야 한다. 성서는 그것이 내포하는 다양한 인간 경험의 빛과 어둠을 함께 볼 때 비로소 그 역사적이고도 풍성한 의미를 드러내며, 우리는 성서의 그러한 역동성 안에서 일관된 사랑과 해방의 소식을 읽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 p.198
바울 자신이 로마서 8장에서 감동적으로 설파했던 것, 즉 하느님의 최종적 승리를 염원하는 간절한 기다림 안에서 모든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과 하나이며,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로 대할 의무가 있다는 그의 장엄한 진리선언을 우리는 바울 자신보다 더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로마서 1:26-27에 근거해서 성소수자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열렬히 주장한 하느님의 철저하고 보편적인 은혜에 대한 소식을 왜곡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로마서 전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 p.355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모두 하나다”라는 말은 예수운동의 인종적ㆍ사회적ㆍ성적 포용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하나됨을 선언한다.
--- p.359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인종, 계층, 성별의 구분과 무관하게 모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상황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조항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하나다.”
--- p.363
초대 교회가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갈라디아서 3:28의 선언을 지키고 실천해왔듯이, 오늘 우리도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그리스도의 몸의 온전한 지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오랜 역사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지켜온 복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 p.364
교회의 존립 근거인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 근거해서 이제 기독교인들은 오랜 편견을 떨치고 살아 있는 인간,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웃인 성소수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 p.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