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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트

아가트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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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9월 07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294g | 134*194*15mm
ISBN13 9788998120672
ISBN10 8998120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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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두 살 은퇴까지 아직 5개월이 남았다. 이는 도합 22주에 해당하고 지금 보는 환자들이 모두 끝까지 함께한다면 상담 회기로는 정확히 800회를 진행해야 한다. 환자 중에서 누군가 병이 나거나 예약을 취소한다면 이 숫자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어찌 됐든,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하다.
--- p.7

저녁을 먹고 나서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이 내 주위 공간에 솜 충전재처럼 퍼질 때 나는 점점 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어떤 생각을 퍼뜩 자각했다. 그게 어떤 생각인지 알면서도, 그 생각이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알면서도, 나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쩌면 난 이러고 싶었을 것이다. 우두커니 홀로 앉아 나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째서 언제나 시작은 이런 식이다 아무도 나이를 먹으면 몸뚱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말해주지 않은 걸까? 관절이 시큰거리고, 살갗이 늘어지고, 눈이 잘 안 보인다고 왜 말해주지 않은 걸까? 비통함을 느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아와 육체 사이의 간극을 관찰하는 것이다. 간극이 점점 더 커지다가 결국은 완전히 낯선 자기 자신을 퍼뜩 발견한다.
이게 뭐가 아름답다거나 자연스럽다는 건가?
--- p.23

“다들 알다시피, 이렇게 상심이 깊은 시기에는 이전 단계로 퇴행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 말이 점점 더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보다 자주 울화가 치밀거나 당분간 그날그날의 일에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세요.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나는 내가 위로의 표정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표정을 그에게 지어 보였다. “이것도 다 지나갑니다.”
앙셀앙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의 시선을 더는 받아내지 못하고 메모장을 내려다보면서 아무 단어나 휘갈겨 썼다.
“장례식은 사흘 후입니다.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울음 때문에 갈라져 나왔다. “그런데 이것도 다 지나간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간적으로 입안이 바짝 말라서 혀가 입천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팔을 저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분이 좀 나아질 때까지 우리의 치료 일정을 연기하면 어떨까요?”
--- p.42

아가트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제 얘기를 계속 들으시긴 한
건가요, 선생님?”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날 좀 잘 봐주세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달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앞머리가 날릴 정도로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리듬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나요. 뭐라도 되어 있어야 하는데 전 지금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치료를 진행한 이래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 맺힌 촉촉한 습기가 눈물이 되어 관자놀이를 지나 새하얀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나는 대화의 흐름을 유지하려고, 아가트의 모든 이미지를 한데 뒤섞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진부한 얘기라면 죄송하네요. 선생님은 분명히 이런 말을 들으신 적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제가 진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답니다.” 아가트가 말했다.
“당신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가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그렇게까지 화가 날 이유가 없어요. 그렇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드는 거죠?”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콧물을 들이마셨다. “자신이 완전히 독특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완전히 하찮은 존재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가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맞는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제가 살아갈 자격도 없는 것 같지만, 또 어떨 때는 아무도 저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참 바보 같죠?”
--- pp.88-89

잠시 후, 베개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죽음을 아세요?”
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다들 그렇지 않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이 말이 공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랜 세월 환자들을 만났죠. 중병을 오래 앓거나 정말로 가까운 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말은 아까보다 더 별로일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모릅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몰라요.”
--- p.93

“두렵다고 했죠?”
“무서워 죽을 것 같아요!” 그가 다시 한번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니 홀가분하네요.”
“그게요, 나도 두렵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무서워요.” 내가 고백했다. “아내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제일 끔찍합니다. 아내가 없는 곳으로 떠난다는 게 말이에요.”
그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토마가 놓아버려야 하는 대상은 아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 아닐까요?”
내가 말을 하고도 이게 말이 되나 싶긴 했지만 토마는 두 손을 뻗어 며칠 전 쉬뤼그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맞아요.” 그는 힘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손으로 애써 내 손을 부여잡았다. “나는 아내를 절대 놓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다 놓아버릴 수 있을 거예요.”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토마가 다시 숨넘어갈 것처럼 마른기침을 했다. 내가 물잔을 건네자 그는 받아서 몇 모금을 마셨다. “선생님이 뭐가 두려운지 꼭 알아내시기 바랄게요.” 그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기대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는 다 끔찍한
쓰레기일 뿐이에요.”
나는 그를 내려다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대부분 쓰레기 아니었을까?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토마는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경험으로요.” 토마는 방황하던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부터 찾아보세요.”
--- pp.95-96

“당신은 뭐가 두려운가요, 아가트?”
“아,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모두 뭘 두려워하는
걸까요?” 그녀는 절망스럽다는 듯 손을 떨어뜨렸다. “그냥 삶 자
체가 위험해진 것 같아요.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두렵고 연주를 멈추는 것도 두려워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두렵고 혼자 있는 것도 두려워요. 내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도 노력해봐야죠, 아가트. 우리가 하는 일이 모여서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아가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짜증 내듯 신음하며 자세를 바꾸었다.
“하지만 일이 또 안 풀리면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실패만 해왔어요. 정말 못 참을 노릇이죠!”
생각지도 않았던 애틋한 감정이 확 밀려왔다. 나는 손을 내밀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야 했다.
“그런데 아가트, 인생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다정하게 물었다.
“무슨 뜻이죠?”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인생의 기준이랄까, 공식이랄까, 그런 게 따로 있는 것 같아서요. 그걸 이루지 못해서 삶 자체를 중단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내 말이 맞습니까?”
그녀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 양쪽에 놓인 두 손으로 의자를 움켜잡았다.
“인생은 너무 짧기도 한 동시에 너무 길기도 한 것 같아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에는 너무 짧아요. 하지만 하루하루 조금씩 무너져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에 너무 길어요.”
--- pp.105-106

“그래도 한편으로는, 혼자 있는 것보다 남편이랑 사는 게 나아요. 그것만 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올리브 부인이 혼자 지내기를 두려워한다는 의미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또 한 번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어쩌면,” 올리브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저 남편을 조금만 더 사랑한다면 매일 아침 은제 식기를 전부 꺼내 새로 닦지 않을 것 같아요.”
이 말에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나는 올리브 부인이 좀 더 사랑하려고 애써야 할 사람은 부인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리브 부인이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네요, 선생님.”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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