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의 코트를 보면 같은 화가가 그린 다른 코트가 떠오른다. 그 코트는 좋은-적어도 저명한-집안의 잘생긴 젊은 남자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당대 가장 유명한 화가 앞에 서 있는데도 젊은이는 행복하지 않다. 날씨는 온화하지만, 그에게 입으라고 한 코트는 묵직한 트위드 재질로, 완전히 다른 철에 입으려고 만든 것이다. 그는 화가에게 이런 선택에 관해 불평한다. 화가는 답한다-우리에게는 그의 말밖에 남은 게 없으므로 그 어조가 부드럽게 놀리는 것, 전문가로서 명령하는 것, 거만하게 경멸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 그의 답은, “이건 당신 그림이 아니라 코트 그림이오”이다. 빨간 실내 가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금 코트를 입은 젊은 남자보다 코트가 더 자주 기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은 개인의 변덕, 가문의 자부심, 사회의 정통적 관행보다 오래간다. 예술은 늘 시간을 자기편에 거느린다.
--- p.11
‘즐거운 영국’, ‘황금시대’, ‘벨 에포크’. 이런 빛나는 상표명은 늘 회고적으로 만들어진다. 1895년이나 1900년에 파리에 살던 누구도 서로 “우리는 ‘벨 에포크’를 살고 있으니 한껏 즐기는 게 좋아” 하고 말한 적이 없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파국적 패배와 1914~1918년 프랑스의 파국적 승리 사이 평화의 시기를 묘사하는 이 말은 1940~1941년, 프랑스가 다시 한번 패배하고 나서야 언어에 등장했다. 이것은 생방송 뮤지컬 쇼로 바뀌어 나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이었다. 기분 좋은 조어이자 기분 좋은 오락물이었으며, 동시에 오-라-라, 캉-캉 프랑스라는 독일의 어떤 선입관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벨 에포크’-평화와 쾌락의 고전적 표현, 퇴폐미가 상당히 섞인 매력, 예술의 마지막 개화, 정착된 상류사회의 마지막 개화. 이 부드러운 환상은 뒤늦게 금속적이고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20세기에 의해 날아가버렸다.
--- p.42
그는 결코 쇼비니즘을 따르지 않았다. 만일 전문적인 진리가 해외에 놓여 있다면 그는 그곳에서 그것을 구할 사람이었다. 의사들이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어떤 식으로 한다거나, 프랑스인은 늘 그런 식으로 해왔다는 주장은 그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 포치는 매우 지적이고, 결단이 빠르고, 과학적인 합리주의자였다-이 말은 삶이 이해 가능한 것이었고, 사랑과 결혼과 부모 노릇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최선의 행동 방향이 그에게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 외에 포치는 우리가 지금 말하기 좋아하는 대로, “역사의 옳은 편에” 있었다. 그는 또 그 전 세대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세대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옷이나 머리 길이나 게으름이나 성도덕이 아니라, 전체 역사와 세계의 기원에 관해서.
--- p.75~77
낡은 것-과거는 가끔 현재를 얼마나 미워하고, 현재는 미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그 알 수 없고, 부주의하고, 잔혹하고, 모욕적이고, 건방지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미래, 이 현재의 미래가 될 자격이 없는 미래. 내가 처음에 말한 것-예술은 늘 시간을 자기편에 거느린다-은 단순한 희망, 감상적 미망이었다. 어떤 예술은 시간을 자기편으로 거느린다. 하지만 어떤 예술- 시간은 잔인한 선별을 한다. 모로, 르동, 퓌비 드 샤반. 이들 각각은 한때 프랑스 회화의 미래로 보였다. 이제 퓌비는-어쨌든 그 이후의 역사적 시기에는-홀로 창백하게 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르동과 모로는 강렬하리만치 서로 다른 은유로 자신의 시대와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 세기는 르동을 선호했다.
--- p.139~140
사뮈엘 포치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사회적 우월성, 편집증, 욕망 어디에도 기초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호기심 많고, 개방적이고, 전문적이었다. 『부인과학 논문』에서 썼듯이 “쇼비니즘은 무지의 한 형태다”.
--- p.185~186
현재의 무엇이 과거를 심판하려고 그렇게 열심인 것일까- 늘 현재에는 신경과민이 있어 자신이 과거보다 우월하다고 믿지만, 혹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끈질긴 불안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더 나아간 질문이 있다. 우리에게 심판할 무슨 권한이 있는가- 우리는 현재이고, 그것은 과거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대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권한이 된다. 게다가 과거가 뒤로 더 물러날수록 그것을 단순화하는 일은 더욱 매력적이 된다. 우리의 비난이 아무리 터무니없다 해도, 과거는 결코 대답하지 않고, 늘 입을 다물고 있다.
--- p.218
초상화를 보면서 우리가 하는 일 한 가지는 우리를 마주보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을 살려내고, 그들과 시각적 대화를 나누려 하는 것이다. 이런 대화에서 우리는 그들의 감정이 우리 감정의 변형이라는-또는 우리가 그들의 입장일 때 우리 자신이 느낄 감정일지도 모른다는-그릇된 가정을 할 수도 있다. 또 그들이, 어찌 된 일인지,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만큼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는 그릇된 가정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의 자세와 옷, 장신구,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그들의 배경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우리가 지배적인 예술적 관행에 무지할 수도 있고, 화가가 모델에게 강요한(또는 모델이 화가에게 강요한) 형식적 결정이 있을 수도 있다. 포치와 사전트는 사이가 좋았던 것이 분명하고 만나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점심을 함께 즐겼지만, 사전트의 마음속에서 이 초상화는 여전히 ‘코트가 핵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포치의 마음속에서는 그림에 나타난 것보다 허세와 으스댐이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는 사전트의 작풍이 그림의 재료보다 중시될 수도 있다고 걱정했을 것이다. 아마 과학적인 눈과 예술적인 눈 사이의 차이를 말없이 계산했을 것이다. 아마 점심(또는 정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함께 그림을 위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 p.267~269
그럼에도 나는 비관적이기를 거부한다. 멀고, 퇴폐적이고, 광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기도취적이고, 신경증적인 벨 에포크에서 보낸 시간이 나를 명랑하게 만들어주었다. 주로 사뮈엘 장 포치라는 인물 때문이다. 그의 조상들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재혼으로 잉글랜드 여자와 결혼했다. 배다른 동생은 리버풀에서 잉글랜드 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1876년에 조지프 리스터를 찾아 리스터 소독법을 배우려고 처음 영국제도를 찾아왔다. 다윈을 번역했다. 1885년에는 며칠 동안 지적이고 장식적인 쇼핑을 하려고 임항 열차 편으로 런던에 왔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진보적이고, 국제적이고, 늘 호기심이 많았다. 열의와 호기심으로 매일 새로 밝는 날을 맞이했다. 자신의 삶을 의학, 예술, 책, 여행, 사교, 정치, 가능한 한 많은 섹스(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으로 채웠다. 그는 고맙게도 결함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일종의 영웅으로 내세우고 싶다.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