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0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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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0쪽 | 474g | 145*220*20mm |
ISBN13 | 9791155813119 |
ISBN10 | 1155813111 |
생전 유언장
출간일 | 2020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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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0쪽 | 474g | 145*220*20mm |
ISBN13 | 9791155813119 |
ISBN10 | 1155813111 |
MD 한마디
40년간 죽음을 지켜본 의사의 기록. 모두가 죽지만,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고비용 첨단수술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보통 사람의 죽음을 다룬다는 사실이다. 좋은 죽음이 뭘까?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 손민규 인문 MD
‘괜찮은 죽음’을 말하는 슬프고도 유쾌한 문장들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이란 게 과연 존재할까? 어떤 죽음이나 지독한 아픔과 깊은 슬픔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책은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180도 바꾸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비애로 가득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말하는 주인공은 40년간 의사로 일한 데이비드 재럿 박사. 그는 병원에서 노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을 주로 돌보는 노인 의학 전문의로서, 삶의 처음보다는 마지막에 더 가까운 이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들이 맞이하는 죽음은 그들이 살았던 삶처럼 각기 다른 모습이다. 질병, 노화, 치매, 자살, 돌연사 등 시종일관 죽음을 얘기하지만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사에 대한 날렵한 통찰을 전한다. 저자는 금기시되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정부가, 사회가, 개인이 이제 더 자주 이야기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죽음을 많이 말하는 사회가 오히려 더 건강할 수 있다는 것. 그가 전하는 ‘33가지 죽음 수업’은 죽음을 미화하거나 억지 교훈이나 감동을 끌어내지 않는다. 다만 리얼한 의료 현장을 스케치하듯 기록할 뿐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두렵기만 했던 나의 죽음에 대해 보다 깊이 냉철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은 가장 훌륭한 명상이 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죽음을 생각하는 하루가 삶을 생각하는 하루보다 나을 수도 있다. 이 책을 곁에 두고 죽음을 직시하는 시간이 오늘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갈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
작가의 말 좋은 죽음 나쁜 죽음 우리는 왜 나이 드는가 좋은 노화 죽음을 자각할 때 접시 위의 죽음 과거로의 여행 죽음의 징조 환자를 죽이는 방법 죽음에 주먹질할 때 새로운 죽음의 방식 밀물 장기적인 노력 빨간 자동차와 가정 방문 어머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아버지 의사들은 어떻게 죽는가 생전 진술서과 생전 유언장 뇌졸중에 관한 대화 놓아주기 변화하는 간병 풍경 요한복음서 11장 35절 최신식 죽음 조이스 미세한 차이와 현대 의학 포터캐빈이 들려준 이야기 전문가들 다른 드럼 아드벡 해법 그야말로 무익한 것 현대판 티토누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고마운 사람들 인용구 출처 |
◆ 소개
▷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 데이비드 재럿
▷ 윌북(willbook)
▷ 2020년 10월 15일
▷ 320쪽 ∥ 474g ∥ 145*220*20mm
▷ 인문학
◆ 후기
▷내용《上》 편집《中》 추천《上》
필멸자(必滅者) 언젠가 죽는 자, 나이를 먹는 자를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이 불멸자로 존재하기에, 대조적으로 인간을 죽을 운명을 가진 자로 표현했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에서는 인간은 필멸자가 아닌 영생을 사는 존재가 된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이 이 세상에서 영생을 가진 존재였다면, 그리스도교에서는 다른 세상에서 인간은 영생의 존재가 된다. 종교가 마케팅이라면 당연히 영생의 길을 열어준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세계 종교가 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의 장례식을 참석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분명 천국으로 가는 길일 텐데, 기뻐 춤추는 사람들은 없고 모두 슬픔에 잠겨있다. 왜 이승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좋은 죽음, 나처럼 가톨릭교도로 자란 사람들은 좋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의 설명서인 교리 문답에 그런 내용이 있다. ‘잠들 때까지 죽음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라. 때가 되면 중재를 바라며 성 요셉에게 기도해도 좋다.’ 나쁜 죽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환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의사들이 고통을 연장하는 연구와 치료를 추천하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이를 때까지 치료를 주장하며 환자의 통증과 모욕감을 연장하기도 한다. 환자의 자율성은 어떤가? 그때쯤이면 대개 환자는 사전 동의가 불가능한 상태다. 현대 의학은 생명 보전과 생명 연장에만 초점을 맞춘 채로 환자의 고통이 연장된다는 사실을 뒷전으로 미룬다.”
“200년 전만 해도 인간의 절반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이제 선진국에서는 70대 후반이나 80대 초반까지 생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끔찍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인간성을 상당 부분 앗아가는 심술궂은 질병에 걸려 기억과 자기 자신을 잃으며 노년에 천천히 죽어간다. 개인적 고통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통제력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플라톤은 죽음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의사 결정 능력’이다.”
질병, 노화, 치매, 자살, 사고, 돌연사 등 수많은 형태의 죽음을 40년간 지켜본 의사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서 말하기 두려워하고 솔직하게 말하길 어려워한다.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저자는 독자에게 묻는다. 좋은 죽음에선 뇌출혈로 병원으로 온 동료 의사의 ‘생전 유언장’에 기재된 ‘연명치료 거부’를 통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을 말한다. 나쁜 죽음은 91세의 팔과 다리에 갑작스러운 마비가 온 환자를 예로 든다. 평생 여러 질환과 수술 이력이 많아서 버틸 체력이 되지 못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살리길 원했고, 넉 달 동안 온갖 현대기술로 연명치료를 했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는 루게릭병으로 인하여 신체의 마비가 시작되고, 점차 언어의 기능도 상실하고, 결국 장기까지 마비되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종우의 병실에는 수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배우자를 간호하는 보호자들도 담고 있다. 언어까지 마비되었을 때, 지수에게 가지 말라고, 같이 있고 싶다고 아무리 외쳐도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 없어 끝까지 간호한 지수가 옳은 것일까? 사지가 마비되고 말하기조차 버거울 때도 버티는 것이 옳은 것일까? 불타 죽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죽음도 없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불태우지 말고, 제발 총으로 죽여달라고 자비를 구한다. 연명치료 기간에 환자가 겪을 ‘기나긴 죽음’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며, 단순히 물질적인 생존상태가 아닌, 인간적인 삶이어야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계기가 되는 책이다.
존경하는 이웃분들 중에, 작년에 장기기증서약을 한 카드 사진을 나누고 올 해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을 서로 고백(?)한 분이 계신다. 연명의료결정법은 2018년 2월에 시행 결정되었고, 2019년 내가 등록할 당시 10만 명이 넘었으면, 작년에 100만 명이 넘었다고 들었다.
“위루관을 삽입한 환자 중 56퍼센트가 1개월 내에 사망 90퍼센트는 1년 이내 사망한다. (...) 생존율이 높아지거나 욕창이 줄어들거나 환자가 더 편안해진다는 증거도 없다.”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 막 즐겁고 기쁘고 그렇지 않다. 준비 과정에서 복잡한 맛을 혀에서 느끼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눈을 감고 잠시 내가 소멸된 세상을 상상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마음이 차가워지기도 한다.
“의료 서비스가 완벽하고 시민들의 품행이 바른 이상적인 사회라면 환자들은 자신에게 정확히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제공받을 것이다. (...) 아니라면 서로 포개지는 이 원들은 소비지상주의, (의로 전문가와 환자 양측의) 무지, 매출 강박 같은 수많은 힘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
우리 삶이 충분히 존엄하게 존중받는다고 생각지 않으니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에도 씁쓸한 감정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준비는 하려고 한다. 매년 갱신해놓는 생전 유언장도 서약도 등록도 그래서 한다.
“수십 년이 넘도록 자연이 현대 의학의 도움과 지원을 받아 노인에게 퍼부을 수 있는 수많은 고통과 모욕을 목격해왔기에, 나의 생전 진술서와 생전 유언장을 작성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이 가장 큰 문제인데, 다른 기술 말고... 사건 사고로 인한 죽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고 그 외의 죽음을 대략이라도 예측해주는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 친구는 내가 관리강박증control freak이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서프라이즈와 돌발을 싫어하는 건 분명하다. 사과도 감사도 인사도 하고 기타 등등 준비도 하고 적어도 죽기 전에는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 목숨만 붙어 있는 삶은 나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다. 나는 고통에 의미가 있다거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지 않는다. 이를 위해, 나는 내 삶의 마지막 시기가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관리되기를 바라는지 간단히 설명하겠다.”
완벽하게 떠나진 못할 것이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부디 가능한 너무 슬프거나 너무 후회를 많이 남기거나 폐를 잔뜩 끼치거나... 하여튼 너무 볼썽사납지는 않기를 바란다.
“평균적인 삶도, 평균적인 죽음도 없으며, 따라서 다음에 생각할 것은 ‘최빈도’ 죽음이다. 가장 자주 발생하는 죽음을 뜻한다. 우리는 이런 죽음에 직면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영국의 상황이니 우리 상황과 맞지 않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생각해볼 거리들은 많다.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지’ ‘안락사는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결정할 권리의 문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