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대상 손해배상소송을 지원하는 연구자와 운동가들은 기지촌 여성들을 ‘미군 위안부’라 칭한다. 정부가 법령 등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지칭했던 명칭을 가져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의 연속성을 드러내고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세 기지촌 여성 중 가장 폭력적인 기지촌 생활을 했던 지니는 자신은 ‘자발적’으로 기지촌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와 전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일본군 ‘위안부’들처럼 총칼로 협박당해 끌려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경험이 개인적 비극일 뿐 피해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때, 지니의 말하기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면 기지촌 여성들이 피해자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놓인다. 혹은 운동의 승리를 위해 잠시 숨겨 둬야 할 말, 연구자나 운동가가 고쳐줘야 할 말이 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지니의 세계관을 담고 있으며, 한 기지촌 여성이 겪어온 인생사를 담고 있는 사실이다. ‘위안부’ 명칭에 대한 지니의 의견은 피해자화를 경계하라는 채찍질로, 법정에서의 승리가 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전제를 재고하라는 요청으로 들을 수 있다. 지니의 말은 가려 둘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하는 말이다. 그 속에서 사회적 의미와 나아갈 방향을 찾고, 일본군 ‘위안부’와의 연결성을 발견한다면 계속해서 연대해야 한다.
--- p.9~10
영미: 나는 검은 애들 있잖아, 여기 티비. 애새끼들을 그렇게. 애새끼들은 왜 그렇게! 처낳고! 밥 처먹고 할 지랄 없으니, 먹을 것도 없는 것들이 무슨 애새끼를 그렇게 많이 낳아-!
(TV: 아이들에겐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세요…)
영미: 그러고, 이, 이렇게 먹을 것도 없으면서, 애들은 왜 그렇게 많이 낳아가지고!
(TV에 다른 광고가 이어진다. 아픈 한국 어린이의 모습과 아이 아버지의 인터뷰가 나온다)
영미: (잠시 후에) 나는, 나 같은 2세가 싫었던 거야.
민주: 왤까? (잠시 침묵) 이모 애기 낳았음 진짜 이뻤을 텐데.
영미: 에? (잠시 침묵) 낳아서… 결혼해서, 미국 가서 살면서- 키우는 거는 괜찮은데. 여기서 혼혈아 그거 뭐, 뭐에다 써먹어! 혼혈아 낳아가지고. 아이구-. 티비 보니까 동두천에. 세상에! 노가다 일 해-. 어디, 지금이니까 그렇지, 옛날에는 써주지도 않았어, 혼혈아는.
--- p.49
은진: 그래도 이모 그 소송, 이기면 배상금도 나오고… 근데 별로예요? (웃음)
지니: (머뭇거리다가) 근데-. (잠시 침묵) 몰라, 주면 감사하게 받겠지만은.
은진: 돈이니까? (웃음) 어떤 게 맘에 걸리세요?
지니: 떳떳하지 못한 돈이지. 그게 뭐 떳떳해. 내가 뭘 잘했다고. 그냥 뭐, 원장님이나- 홍 간사, 유 간사가, 응? 쫓아다니면서 핸 거, 우리는 뭐 핸 것도 없잖아- 법정에 몇 번 같이 가자 해서 간 거뿐이잖아. 그리고 뭐, 우리가 일본 위안부야? 아니잖아-.
(침묵이 이어진다)
은진: 근데 다른 이모들 중에는, 모두는 아니지만, 강제로 속아서 오신 분들도 있고. 그렇다고 하던데요?
지니: 대부분 이런 데 들어올 때 다 그래-. 다 돈 벌기 위해서 나왔겠지, 뭐. 내가 아는, 내가 알기로는 다 돈 벌라고 나왔어.
은진: 어느 정도 알, 아예 모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지니: (잠시 후에) 처음에 나도 이런 덴 줄 몰랐지, 저 법원리, 파주에-. 미국 놈하고 기냥, 미국 사람하고 술 같이 마시라는데. 그게 아니잖아. 무조건 상대하라는 거지…. 술 같이 먹구 그러면 팁 나온다, 첨에는, 포주는 그렇게 꼬시지.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아이고, 이제 고만 말해! 징그러!
--- p.197
경빈: 그럼 이 클럽 다섯 개… 일하신 게, 다 써빙?
윤선: 88년도까지. [그러고] 나서, 이제 써빙.
경빈: 무슨 클럽까지 아가씨 하시고 [써빙 시작하신 거예요]?
윤선: (버럭 화를 내며) 그걸 왜 적어! 뭐 나 혼자 한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저거 한 거 나 혼자야?
경빈: (당황한 목소리로) 아, 그러니까…
윤선: 그러니까 그걸 물어보지? 그런 거 같어.
경빈: 그러니까, 아까 저는 다섯 개 말씀해주신 게 다 써빙 일 할 때 이야긴 줄 알았는데….
윤선: 아가씨! 아가씨 생활 할 때.
경빈: 그러면 더 폴, 그니까, 어디서부터… [써빙을 한 클럽인가요]?
윤선: 써빙은… 몇 군데 안 돼. 그런 대신에 오래 했지. 하나, 둘, 셋. 써빙은 세 군데서 했는데 좀 오래 했지.
--- p.259
이 책에서 영미, 지니, 윤선은 기지촌 운영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 진술서를 적어 내릴 때와 똑같이 말하지 않는다. 민주, 경빈, 은진은 기지촌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을 피력하고, 기지촌 여성이 구술한 이야기를 받아 적는 대신 문학적 말하기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모들의 ‘의견’과 이모들과의 ‘관계’를 ‘재현’하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책은 말과 말소리, 어조, 몸짓의 표기를 신중히 고려하고 최대한 기록하며, 청자이자 기록자의 질문과 반응도 함께 담는다. 평택에서 이미 이모들의 생애사를 기록해 펴낸 적이 있는 민주의 영상 세 개도 이에 가담한다. 가령 〈울긴 왜 울어〉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데〉와 같은 영상은 이모 집의 스산하고 따스한 풍경과 소리, 방문자와 주고받는 대화로 법적 증언, 논리적 진술, 심지어 언어 바깥에서 일어나는 다성적 재현을 제안한다. 우리는 글에서도 영상에서도 여러 목소리와 여러 사람들이 충돌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장면을 계속 목격할 수 있다.
… 평택을 찾아간 이들과 평택에 살고 있는 이모들 사이의 차이는 굳이 은폐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계층과 지식의 차이에는 괄호가 생기기도 한다. 젊은 작가와 학생이 이모들이 묘사하는 사건의 흉악함에 놀라거나 디테일에 감탄하는 순간, 차이에는 괄호가 쳐진다. 차이에 괄호가 쳐진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은폐된다는 뜻이 아니다. 차이에 괄호가 쳐지는 순간은 함께 기억하고 있는 이들, 함께 같은 것을 감각하는 이들이 ‘공동체’로 묶이는 순간을 뜻한다. 재현이 관계의 작업일 때 괄호는 스스로 생겨나고 사라진다. 경험의 공동체는 사라지더라도 잠깐, 우발적으로 나타난다.
--- p.285-287, 「해제 〈이모들의 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