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왜 아버지가 남동생에게 선물한 만년필을 갖고 싶어 했을까. 그런 욕망에도 긴 역사가 있다. 연필과 만년필, 임시적 존재에서 영구적 존재로의 욕망은 새로운 게 아니다. 툭하면 지워지고 대리되고 삭제되는 존재들에게 중첩되는 상처, 그러니까 그 영화는 그런 비가시적 존재들에게 몸을 빌려주고 상처에 대해 말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 「검색창에 연필을 입력하세요」 중에서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 「다이아몬드와 같은 이름」 중에서
발단은 연필 커뮤니티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돌아오는 “이 점 나만 있나요?” 타임이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고양이처럼 나만 없네 또. 의학적으로는 ‘외상성 문신’, 정확히는 흑연 같은 이물질이 상처 속에 침착되어 점처럼 보이는 거였다. 그 점이 있는 사람은 적지 않았는데 정작 그것을 부르는 합의된 단어가 없었다. 연필에 찔리는게 한국 사람뿐이겠나 싶어 영어권 표현을 찾다가 발견한 게 그래파이트 타투(Graphite Tattoo). ‘흑연 문신’이라고 번역하면 어감이 달라지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앞으로 그래파이트 타투라고 부르기로 했다.
--- 「그래파이트 타투」 중에서
연필의 나무가 연필을 구성할 때는 심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외부 충격으로부터 심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연필에서 깎여나갈 때 나무는 칼날과 결을 맞춰 부드럽게 움직이고 저항이 덜해야 합니다. 언뜻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이상적 조건을 한 나무에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몇 세기에 걸쳐 이어졌지요. 그들 덕분에 나는 강하면서 결이 고운 또는, 단단하게 사라지는 무언가가 세상에 있다는 걸 압니다. 늙음과 사라짐이 쇠약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당신의 손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 「스페인 프리힐리아나의 실비아 씨」 중에서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 「연필 장례식」 중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거리 출몰하기: 런던 모험」 중에서은 “연필 한 자루를 향한 열정을 느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확신으로 시작한다. 글의 첫 문장부터 ‘저기, 이의 있습니다!’ 하기도 쉽지 않은데 울프의 에세이가 딱 그랬다. 1927년이라면, 특히 여성 사이에서라면 저 확신은 수월하게 공감을 얻었겠지만 지금 저 문장을 내가 아는 몇몇 연필 커뮤니티에 던져놓으면 순식간에 고양이 앞의 츄르가 될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의 연필」 중에서
연애는 끝났고, 어떤 언어들은 마음처럼 하릴없이 부서졌다. 내가 나를 견디며 살아가듯 부서진 언어들도 나비나 물고기가 되어 세계를 견디고 있다. 춤을 추면서. 그것들을 두 손으로 그러모아 조심조심 종이 위에 놓아주면 시가 될지도.
--- 「다와다 요코의 연필」 중에서
나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쓰고 기록하는 여성들에게 연필은 그랬다.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수감된 여기자들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기록을 이어가고 중요한 정보를 신문사로 유출할 수 있었던 건 어떤 교도관이 몰래 넣어준 몽당연필 덕분이었다는 회고록 속 연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몽당연필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표류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쓰다가 남은 것과 같이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길이였다고 했다.
--- 「최윤의 연필」 중에서
손의 압력으로 부서진 연필심이 종이 섬유질 사이에 한번 자국을 남기면 압력과 부서짐이 더해지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지우고 다시 쓴다는 건 흐려진 자국 위에 덮어 쓴다는 말이고, 덮어 쓰면서 세계를 여러 번 다시 진행시킨다는 의미다. 한 번은 어둠 뒤에서, 한 번은 어둠과 나란히, 그러다가 어둠을 따돌리고. 한 편의 여성 서사가 완성되는 과정이 그럴 거라고 상상한다. 처음에는 연필로, 지우고 다시 흔적 위에 연필로, 지우고 더 진하게 연필로.
--- 「조이스 캐롤 오츠의 연필」 중에서
조앤이 남편을 잃고 쓴 『상실』 속 그 표정을 조앤이 쓰던 연필과 같은 시대의 나무, 흑연으로 만들어진 몽골 482를 손에 쥐고 내가 짓고 있다. 궁금하다. 조앤도 그런 표정으로 서 있는 자기가 여럿 나오는 꿈을 꾼 적 있을까. 내가 상실 전후의 나‘들’을 어떻게 봉합해야 하는지 난감한 채로 간혹 꾸는 꿈은 조앤의 글을 지형 삼아 진행되곤 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사람들이 꾸는 꿈은 어딘가 닮았다. 내 꿈에서 먼저 떠나는 사람은 늘 나였다.
--- 「조앤 디디온의 연필」 중에서
파버 드로잉 연필의 탄생과 소멸 그 중간쯤이 될 1868년 소설 속 에이미가 원하던 연필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 먼 시공간에서 빌려온 듯한 연필 한 자루의 용도는 간단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리고 그리워할 수 있었다. 쓰고 쓰라릴 수도 있었다. 갖고 싶은 연필을 포기한다는 건 그 모든 순간의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말일 텐데. 왜 아직 시간 여행이 불가능한 걸까. 1868년 에이미 손에 이 연필 좀요!
--- 「루이자 메이 올컷의 연필」 중에서
--- 「루이자 메이 올컷의 연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