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쩌면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재희는 다짐하듯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이 떠나간 이후로 재희에게는 조금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자신이 걷는 걸음걸이를 수시로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단순히 숫자만 세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걸음을 세는 방식에는 정확한 리듬이 깃들어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재희는 틈만 나면 그 묘하게 지연되면서 떠밀리는 듯한 박자를 읊조렸고, 그러다가 정신이 들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기묘한 감각을 떨쳐내곤 했다. 실험을 하다가도, 회의를 하다가도, 심지어 이렇게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나서도 그녀의 뇌는 기습적인 트랜스 상태에 빠져들었다. 도망치듯 컴퓨터실에서 빠져나와 먼동이 밝아오는 로비를 거닐던 중, 재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재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지난 일주일 동안 되새김질하던 것은 자신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은성의 발걸음이었다. --- p. 20
“왜인지 아니? 생존을 위한 모든 고려와 계산이, 그 순간에는 멈추어버리기 때문이야.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임종은 이미 생에서 제외되어 있는 순간이란다. 그러니 해당 기간은 우리 연구에서도 제거되어야 하지.”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박민경은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났다. “그동안 인간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죽었어. 그러나 너희 때부터는 그렇지 않아. 죽음은 사고일 뿐이고, 얼마든지 번복 가능한 사건이 되었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사다리에 올라타는 데 실패한 인간들을 우리는 분석해보려는 거야. 지구가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은 우주선에 올라탈 수명이 부족해서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아 도태되겠지. 죽음을 맞닥뜨리고 나서 그들이 무슨 후회를 하든, 또 무슨 감정을 느끼든 우리가 알 바는 아니란다. 그 순간은 이미 아무런 효력도 없으니까.” --- p. 33
동굴처럼 새카만 두 눈이 재희를 쳐다보았다. “네 내면 깊숙이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들여다봐. 그들은 결코 알려고 들지 않는 네 진짜 마음을. 규칙을 어기게 만들고, 처벌도 불사하도록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그것이 너를 계속해서 인간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박재희 씨, 저들은 네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한지에 대해서밖에 관심이 없어. 조금의 탈선만으로도…….” 그녀는 맨 마지막 줄의 의자 헤드를 톡톡 쳤다. “너는 퇴출당할 거야.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접촉을 감지한 의자에 램프 신호가 들어왔다. 접촉 불량을 알리는 붉은 램프였다. “이 지독한 독재로부터, 범재는 우리 모두를 구해주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