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으로 시작한 로스팅이 결국 작은 수동 로스터를 구입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을지로를 돌아다니며 사 모은 부품으로 수제 쿨러(로스팅한 커피를 식히는 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는 커피를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미국과 일본, 이탈리아를 다니며 커피에 쏟아 부은 돈이 어림잡아 자동차 한 대 가격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이 서른에 쓰린 속과 텅 빈 통장만 갖게 되었다. --- p.19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의지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사병으로 군 입대를 할 경우 환경의 제약이 이루 말할 수 없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커피생활을 위해 복무 기간이 두 배나 긴 학사장교의 길을 택했다. 단체 숙소에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새벽부터 그라인더를 갈아대다 동기들의 눈총을 받았고, 결국 화장실에 들어가 원두를 갈았던 적도 있었다. 긴급하게 작전실로 출근해야 할 것에 대비해 언제든 레디-투-고 커피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냉침 커피를 만들어 늘 냉장고에 보관해둔 것인데, 유용하게 썼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타 부대로 훈련을 나갈 일이 있을 때면 드립백을 챙겼고, 군용품을 활용해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 p.42~43
마찬가지로, 메뉴를 주문하는 일에 있어서도 정답은 없다. 한 가지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면, 메뉴판에 없는 메뉴는 시키지 않는 것이다. 가령 메뉴에 아이스 음료로 제공하지 않는다고 표시되어 있다면, 굳이 시원하게 마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주방에 휘핑크림이 보인다고 해서 메뉴판에 있지도 않은 아인슈페너를 시켜서도 안 된다. 메뉴판에 없는 메뉴는 준비가 되지 않은 메뉴이며, 시켜도 맛없을 확률이 높다. 무얼 마실지 고민이 된다면 바리스타에 추천을 요청하자. 역시나 오늘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메뉴를 추천해줄 것이다. --- p.71~72
진정으로 커피를 사랑하는 바리스타들만큼이나, 커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덕후들도 커피 잔에 대한 애착이 클 수밖에 없다. 집에서 커피도 볶고 직접 내려 마시는데 좋은 잔이 없으면 화룡점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에둘러 커피 잔을 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과감하게 돈을 쓰는 만큼 멋진 핑계를 마음에 두어야, 가벼운 지갑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질 것 같아서다. --- p.119
고종은 커피 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잘 정제된 지금의 커피와는 다르게 투박한 맛이었겠지만, 염소도 춤추게 만들었던 카페인의 힘은 통치의 고단함에 어깨가 짓눌린 고종의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어렵사리 구한 로부스타 커피를, 또 브라질산 커피를, 각각 프렌치 프레스에 내려본다. 두 커피 모두 구수하고 씁쓸하여 누룽지의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잔을 따라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은 한 뼘 누그러진다. --- p.139~140
쿠릉쿠릉 쿠르릉, 오래된 지하상가는 전철이 오갈 때마다 기묘한 소리를 내며 울어댔다. 카페 한켠을 차지한 백발의 어르신들이 심각한 목소리로 국제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100분 토론’ 못지않은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테이블 위에는 취향 따라 생강차도, 주스도, 커피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얼마 되지 않는 커피 값을 서로 내겠다며 싸우는 그 모습이 마치 이 다방의 오랜 전통이나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스르르 긴장이 녹아들 때쯤, 주문한 ‘스페샬 커피’가 나왔다. 커피 맛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얼마든 넣어도 넘치지 않는 프림과 설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격은 고작 2,000원.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한 시간도 넘게 앉아 있었는데, 이 가격에 이렇게 포근할 수 있는 공간이 서울에 또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