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에서 만난 새로운 삶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져 전국 각지에 비슷한 길이 만들어지고 해외에서도 이 길을 걸으러 찾아온다는 제주 올레길. 올레는 제주어로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이라는 뜻이다. 제주도만의 독특한 길들을 엮어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트레일이 제주 올레길인 셈이다.
이런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을까? 그저 올레길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서 걷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자연과 길은 우리의 마음속 깊이 담겨져 있던 오래된 생각과 상상 들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올레길에는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떠올린 다양한 사색과 생각 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저자 박지현 또한 다른 사람들의 사유와 사색 위에서 자신만의 사색을 했고, 이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에 담았다.
“혼자 걷는 길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걸으며 저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길을 걸으며 슬퍼하고 분노한 적도 있지만 칭찬하고 감사하고 기뻐한 일이 더 많았습니다. 나와 내 삶에게.”
_작가의 말 중에서(6p)
▶ 미처 몰랐던 올레길의 다양한 얼굴들
올레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색과 사유의 장소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 안녕의 광장이다. 지금까지 몰랐던 가족들의 새로운 면, 자신의 새로운 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어두운 과거를 되밟다 마침내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과거의 종착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은 올레길을 걸어보아야 한다. 실제로든, 책으로든.
“나는 혼자서, 천천히 혹은 빠르게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언제든 멈추거나 머무를 수도, 길에서 먹고 마실 수도 있게 되었다. 온종일 혼자 걷는 동안 감각은 예민하고 섬세해졌다. 처음 여행하는 사람처럼, 처음 걷는 사람처럼, 지구에 처음 내려온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다. 길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흥미롭고 새롭다. 혼자 여행을 하면 별 게 다 궁금해진다. 혼자 질문하고 답을 내리기 위해 끝없이 상상한다.”
4코스_〈그저 걸을 뿐〉 중에서(73p)
단순히 길을 걷는 것만으로 현실에 치여 막혀 있던 상상력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제주의 중심에 서 있는 한라산은 제주를 창조한 신인 설문대할망이 되고, 오름 군락은 영원히 굽이치는 푸른 파도가 된다. 엉또 폭포 바닥의 암녹색 물은 물에서 사는 사람의 보금자리 같고,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은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제주에 마음을 의지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신의 손길 같다.
“솔향 짙은 삼매봉을 오르는 동안 까치 소리가 요란했다. 소나무 사이로 한라산이 보여서 발걸음을 멈춰 할망을 찾아보았더니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지 눈가의 미소가 사라지고 벌리고 있던 입은 꾹 다물려 있었다. 그런데 할망의 모습이 좀 전과 달랐다.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선이 부드럽고 둥실했으며, 주름진 목은 가냘프고 길어졌고, 머리카락이 풍성해졌다.”
7코스_〈원래 그래〉 중에서(120p)
올레길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올레길은 자연과 문명을 넘나든다. 차가 쌩쌩 달리는 해안도로를 걷다가 갑자기 정글 같은 숲 곶자왈(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제주도의 독특한 숲 또는 지형)으로 길이 이어지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출발해 조용한 오름이나 산의 둘레길을 하염없이 걷게 될 때도 있다. 총 26코스로 나누어진 올레길은 각각 다른 매력을 뽐내며 우리를 계속 걷게 만든다.
“4월의 가파도는 연두와 초록의 파스텔 색상으로 물들어 있었다. 봄날을 그린 수채화 같은 색이었다. 청보리 물결로 섬 전체가 출렁여 상큼하고 싱그러웠다. 봄바람이 건듯 부는 청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면 나에게도 초록물이 들 것만 같았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10-1코스_〈사람은 이상하다〉 중에서(184p)
▶ 잃어버린 것들, 그럼에도 남은 것들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에는 저자가 어릴 때 겪었던 힘든 일들이 종종 언급된다. 저자는 열네 살에 유괴를 당할 뻔했다. 친절과 상냥한 마음이 한 순간에 배신당하는 경험을 했다. 또 반복되는 이사와 부모님의 별거로 인해 마음 둘 곳 없이 홀로 고독과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 이 힘듦은 이십 년 가까이 저자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저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해가 질 때까지 동네를 맴돌았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세 바퀴쯤 돌았을 때야 똑같은 가게를 발견하고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_8코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중에서(147p)
하지만 올레길을 걷는 동안 저자는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이 과거들은 ‘그저 힘들었던 과거’에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이겨낼 수 있는 과거’로 탈바꿈해간다.
“늦된 아이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인지,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어린 아이에서 멈춰 버렸다. 어린 나를 조건 없이 사랑했던 외가 식구들이 무대를 옮겼을 뿐, 그 무대에서 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_12코스 〈그림자와 투사〉 중에서(219p)
누구나 하나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린 과거가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언급되는 저자의 과거와 그에 대한 사유에 자신의 과거를 반영해본다면 마음속으로 저자와 함께 올레길을 걸으며 ‘힘든 과거’를 ‘힘들었지만 나를 성장시켜준 과거’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내 몫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니, 그저 그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걸어오는 동안 길에서 많은 생각을 했고 버렸다. 이제 열네 살의 그날을 다시는 읽지 않을 책처럼 덮어둘 수 있을 것 같다.”
_13코스 〈소박하지만 분명한 친절〉 중에서(224p)
▶ 걷기 여행은 아주 좋은 책이다
걷는다는 행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어떤 힘듦도 다가오지 않는 무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언제나 활기찬 사람은 길을 걸으며 점점 차분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방식의 여행도 물론 그렇지만, 걷기 여행은 특히 우리의 마음이 ‘리프레쉬’되도록 도와준다. 봐도봐도 계속 보고 싶은 아름다운 경치도 한몫을 한다. 그래서 걷기 여행은 아주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좋은 책을 읽으면 답답한 마음이 비워지거나 텅 비어있던 마음속이 꽉 차듯, 걷기 여행도 그렇다.
“올레길은 모두 스물여섯 개의 코스가 있으니 완주를 하면 경험을 확장시키고 나를 성장시키는 스물여섯 권의 책을 읽는 셈이다. 오감으로 만나는 감각은 감성을 섬세하게 자극시
키고 수없이 걸으며 만나는 자연과 세상, 사람들 그리고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길은 또다른 길로 연결되어 지금 걷는 이 길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상상하게 한다. 그 기억과 상상 속에 부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꿈과 희망,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_20코스 〈걷기 여행은 아주 좋은 책〉 중에서(331p)
걷기 여행은 한 밴드의 노래 제목처럼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함께 걷든 혼자 걷든 일단 길을 걷다 보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다. 과거 혹은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는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타인만큼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는 이런 모든 나를 단단한 마음으로 감싸주고 올레길 위에서 커갈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