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0년 1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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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20쪽 | 764g | 153*224*30mm |
ISBN13 | 9791164136452 |
ISBN10 | 1164136453 |
출간일 | 2020년 1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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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20쪽 | 764g | 153*224*30mm |
ISBN13 | 9791164136452 |
ISBN10 | 1164136453 |
MD 한마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이 다시 정의를 묻는다. 현대 많은 사회에서 합의하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차등'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마이클 샌델은 미국에서 능력주의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개인의 성공 배후에는 계급, 학력 등 다양한 배경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회를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 손민규 사회정치 MD
마이클 샌델 10여 년 만의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 출간! 샌델, 기울어진 사회구조 이면에 도사린 ‘능력주의의 덫’을 해체하다 또 다시 ‘공정’이 화두다. 언론 미디어를 통해, 부유층과 빈곤층, 청년과 장년, 정치인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기업은 정규직?비정규직 논란에서 비롯된 ‘공정 채용’ 문제로 혼란에 빠져 있고, 정치권에선 ‘공정경제3법’과 ‘재난지원금’ 등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으로 떠들썩하다. 대통령은 “하나의 공정이 또 다른 불공정을 부르는 상황”을 언급하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렇듯 ‘공정’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두고 각계각층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쓴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란 원제로 미국 현지에서 2020년 9월에 출간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직역하면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해왔던,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주는 능력주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능력주의가 제대로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공정함=정의’란 공식은 정말 맞는 건지 진지하게 되짚어본다. |
서론: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입시의 윤리 | 능력 지표 따내기 CHAPTER 1. 승자와 패자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 능력주의 윤리 | 굴욕의 정치 |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 포퓰리즘의 준동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왜 능력이 중요한가 | 우주적 능력주의 | 구원과 자기 구제 |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 부와 건강 | 자유주의적 섭리론 | 역사의 옳은 편 | 도덕 세계의 궤적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 시장과 능력 | 자기 책임의 담론 |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 포퓰리즘의 반격 |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 보는 것과 믿는 것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무기가 된 대학 간판 |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 최고의 인재들 |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 학력 간 균열 | 기술관료적 담론 |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 기후변화 논란 CHAPTER 5. 성공의 윤리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 시장과 능력 |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가 인정된 자격인가? | 성공에 대한 태도 | 운수와 선택 | 재능 계산하기 | 능력주의의 등장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 쿠데타 |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 코넌트의 능력주의 유산 |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 인재 선별 작업과 사회적 명망 배분 | 상처 입은 승리자들 |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 오만과 굴욕 | 유능력자 제비뽑기 |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 명망의 위계질서 |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CHAPTER 7. 일의 존엄성 일의 존엄성 하락 | 절망 끝의 죽음 | 분노의 원인 |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 기여적 정의 |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 ‘열린 어젠다’의 오만 |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
마이클 샌델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새로운 화두, ‘공정’을 들고 우리 곁을 찾아왔다.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로 지난 9월 출간됐다.
현재 ‘공정’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가령 기업은 ‘공정 채용’ 문제로 혼란에 빠져 있고, 정치권에선 ‘공정 경제’ 관련 법안으로 떠들썩하다.
책에서 샌델 교수는 “우리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주는 능력주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노력한 대로 받는다’는 능력주의 이상이 허구라고, ‘공정함은 곧 정의’라는 통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러고 보면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비되는 것처럼 이미 사람들은 스타트 선상에서부터 각자 다른 조건에서 시작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인 사람이나 교육을 많이 받은 집안에서 자라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계층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갖기 마련이다. 이는 곧 부의 세습이요, 자본의 대물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그렇다’라고 답변한다면 당신은 능력주의 옹호론자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코로나19 시대 강남 엄마들은 신이 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선행 학습과 고액 과외를 맘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수업하다 보니 학력 격차도 점점 심해지는 모양이다.
샌델 교수는 특유의 문답과 예시로 독자들을 논리의 향연으로 이끄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신간 역시 그가 펼치는 논리 전개는 스스로 생각하기, 스스로 실천하기에 이르는 소크라테스식 해법이 주된 방식이다. 이제 교수와 함께 능력주의와 관련한 철학과 윤리 문제를 살펴보기도 하자.
책은 2019년 3월 미국에서 터진 대형 입시 스캔들로 시작한다. 33명의 부유한 학부모들은 자녀를 명문대에 넣기 위해 입시 부정에 가담했다. 윌리엄 싱어라는 브로커는 학부모들에게 거액을 건네받아 SAT 답안지를 조작하거나 가짜 체육특기생을 만들어냈다. 그는 무려 8년간 2500만 달러를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11월 한국에서도 미국 명문대에 입학시켜주겠다며 학부모들에게 입시 컨설팅 명목으로 거액을 받고 고교 성적증명서 등 서류를 조작한 일당이 적발됐다.
이 스캔들은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분노는 단지 ‘특권층 부모들이 불법적 수단으로 자녀들을 명문대에 입학시켰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누가 앞서가고 있으며, 그것이 왜 허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만들어냈다. 샌델 교수가 이번 책에 착안하게 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중략)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51쪽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샌델 교수는 1980년부터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쳐오면서 해가 지남에 따라 학생들의 의견이 바뀌는 것은 없는지 살펴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에 따르면 199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상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는 신념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진단한다. 능력주의는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주는 가혹한 현실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에 따르면 능력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 불일치는 공정성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성공과 실패 또는 승리와 패배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도,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승리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도 문제다.
저자는 오늘날 민주사회의 정치 담론 중심에 있는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를 비교 분석한다. 이에 따르면 두 사상 모두 성공관에 있어 능력주의와 구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능력을 정의의 기반으로 삼는 일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적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경제 불평등을 줄이려는 정부 노력에 반대하면서 자유시장이 각자에게 걸맞은 보상을 해준다고 보았다. 또한 소득이나 부의 재분배를 반대하기 위하여 “시장은 능력에 대한 보상과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와 반대로 롤스는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며 계층 차이에 따른 불이익을 완전히 보상해 주는 체제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로 부르기에는 불충분하다”면서 “재능의 차이는 계층의 차이 만큼이나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우연적 요소”라고 지적했다. ‘부자는 돈을 벌 만한 자격이 있어서 번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해 재분배를 옹호했다.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 된다’고 봤다. 이처럼 두 사람은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것을 가져야 한다’는 능력주의 신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샌델 교수의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능력주의자들이 초래하기 쉬운 오만과 굴욕에 벗어나 공동선을 만들고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샌델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민주당을 주된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좌파 엘리트들의 능력주의적 태도와 기술관료적 통치가 세계화에서 낙오된 패자들을 제대로 품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폭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원한 것은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통한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존중’인데 그것을 미처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파고든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이 제시하는 대안은 ‘일의 존엄성’ 회복이다.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교수가 전제하는 것은 ‘시장의 성과는 각자가 공동선에 기여한 것의 참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논리를 뒤엎는 것이다. 시장의 낙인에서 벗어나 우리가 공동선에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노력의 일환이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 343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더 바람직한 공정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샌델 교수는 ‘운’이 주는 능력 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로 연대하며, 일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곳이든 일정 능력은 필요로 하는 법. 다만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보는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어떤 기준을 정해놓을 필요가 있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공정(公正) : 공평하고 올바름.
‘공정’의 사전적 의미를 접하고 나니, 과연 ‘현실세계’에서 ‘공정’에 대한 화두를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든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 시선을 지닌 걸까?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접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공정’에 대한 논의를 공허하게 느끼게 한다.
우리사회에서 ‘공평하고 올바름’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고 논하는 ‘공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출발선이 다른 상황에서 기회의 공정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 기울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그 노력은 의미를 지닐 것인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사회이동성’을 전제로 한 ‘기회에 대한 공정', 즉,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나 자라더라도 공정하게 주어지는 기회에 의해 그리고 내 노력에 의해 사회적 위치의 이동이 가능하게 해주는 ‘기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주는 듯 보이는 ‘능력주의’와 이를 위해 강조되는 교육(학력주의)을 다각도로 바라본다. 과연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공정’한 기회의 수단이 되어주는가
예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과연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여러 측면에서 ‘정의’를 바라보고 고민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 역시 유사하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끊임없이 내가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여겼던 ‘공정’에 대해 헤집으며 나를 고민에 빠뜨린다.
CHAPTER 1. 승자와 패자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CHAPTER 5. 성공의 윤리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CHAPTER 7. 일의 존엄성
# 능력주의
미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참아왔다. 어디서 출발하든 부자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승 가능성에 대한 이런 믿음은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다. p.49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지금은 미국 사회 역시 그 안에 많은 사회적 갈등을 지니고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단어의 속삭임은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책에서 만난 현실은 녹록치 않아보인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부터 지금껏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퍼센트에게 돌아갔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p.48
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노력으로 능력을 키우고 그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능력주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응원으로 들리기도 한다.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또한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중략)..이는 우리 운명이 우리 손 안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우리는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며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 p.66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p.145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에 깔려있는 잔인함에 대해 지적하는데, 이제껏 ‘열심히 노력해라’, ‘하면 된다’는 응원만을 강조하며, 실패에 대한 원인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로 치부해왔던, 우리 사회가 간과하고 있던 일면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하면 된다” 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p.53
저자는 능력주의를 부추기는 개인의 노력, 하면 된다는 신념에 깔린 이중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항상 ‘성공’한 사람에 대해 찬사를 보내며, 나도 할 수 있다 자신을 몰아가지만, 그렇다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그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우리가 기회의 공정함에 대해 논하게 된 것은 이미 출발할 때부터 타고난 행운을 거머쥐고 시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간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것인데, 어느새인가 그 고민은 잊고,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p.53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105-106
# 학력주의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찾는 시스템 틀 안에서는 교육 시스템의 책임이 막중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불평등이 꾸준히 늘어남에 따라 교육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교육이 이 사회의 다른 죄악들을 사면해주기를 바라며‘
- 크리스토퍼 헤이즈(작가, MSNBC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 pp.148-149
능력주의 화두를 통해 이제껏 간과하고 있던 측면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학력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든다. 마치 ‘일단 능력주의의 문제점은 잠시 접어두고, 사회에 나가기 전 나의 능력 향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되는 ’교육‘은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 싶다.
대학들은 현대사회의 기회 배분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다. 고소득 직업과 명예로운 지위로의 여정에 있어 관문 역할을 하는 ’학위‘를 발급하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에서 이런 역할은 양날의 검이다. p.248
일단 기회 배분을 한다니 다행인가 싶은데 이 역시 양날의 검이라 표현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미국 대학은 놀랄 만큼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사회적 상승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그들이 그 대학에 다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경제적 전망을 높여줌에도 그렇다. 대졸자 특히 명문대 졸업자는 고소득 직업을 갖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사회적 상승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입학 때부터 상류층 소속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부분의 사람이 최상층에서 올라타는 엘리베이터와 같다. p.266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고등교육을 기본적인 기회의 엔진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는 슬픈 소식일 것이다. p.266
이미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서도 다시 그들끼리 만나 ‘그들만의’ 사회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더 이상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믿지 않는 우리 사회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SAT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점수는 올라간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대학을 노리는 학생들의 점수를 보면 이 격차가 특히 크다. p.259
저자는 여기에 더해 학력주의가 주는 폐해를 하나 더 지적한다. 바로 ‘대학’을 필수사항처럼 생각하는 사회적 시선이다.
더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도록 권하는 일은 좋다. 못사는 집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더욱 좋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p.150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제껏 별다른 의심 없이 당연하다 받아들였던, 노력하면 된다는 믿음, 능력에 따른 보상,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응원의 적나라한 이면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여기에서 앞서 언급했던 ‘아메리칸 드림’을 다시한번 들여다볼까 한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것 중 하나가 고착된 이미지를 형성한 이 단어의 조합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가 이다. 바로 ‘미국의 서사시’라는 글을 쓴 제임스 애덤스라고 한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p.350
- 애덤스 ’미국의 서사시‘ ’아메리칸 드림
그런데 무언가 내가 알고 있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나의 능력이나 학벌에 관계없이 오롯이 나로써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다.
자세히 읽어 보면 애덤스가 말하는 꿈은 단지 사회적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 폭넓고 민주주이적인 조건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 p.350
또한 저자가 말하는 ‘공동선’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고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운동장의 위쪽에 서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대안이 아닌, 승자가 남들보다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을 제시했다. 가장 잘 달리는 주자에게 납이 들어간 신발을 신길 필요는 없다. 마음껏 전속력으로 달리게 하라. 다만 그의 승리가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님은 분명히 해야 한다. 재능 있는 이들이 그 재능을 한껏 갈고 닦도록 하라. 그러나 그들이 받는 보상이 시장에서 부풀려지면, 그것은 공동체 전체와 나눠가져야 한다. pp.209-210
솔직히 마지막 챕터인 ‘결론 : 능력, 그리고 공동선’에 실린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300페이지가 넘게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를 통해 공정에 대한 화두를 던진 후에 만나는 결론이었기에 명확한 방향을 설정해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답인건가, 생각하니, 과연 현실에서 공정이라는 담론은 이론에 그쳐야 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시 글을 읽고, 곱씹을수록 결국 사람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민주주의와 겸손’이라 적힌 소제목을 바라보며 상황을 악화시키고 왜곡시키는 것만큼 그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고민해야하는 것도 다름아닌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성공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진정으로 믿으면, 그런 행운을 남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마음도 들지 않겠는가. p.229
*덧붙이는 글
글에는 적지 못했지만, 이 책에서는 공정에 대한 미국 사회의 시선을 정치인들의 행보에 빗대어 설명하는 대목이 많아 미국 정치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될 당시의 상황과 그 기저에 눌려있던 대중의 요구를 살펴볼 수 있어서 며칠전 새롭게 시작한 바이든 정부의 행보에 관심이 간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것처럼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수십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핸된 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이는 또한 경제와 무노하 조류에서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항의를 나 몰라라 한 테크노크라트 정치에의 반발이기도 했다.
괴로운 진실은 트럼프가 각종 불안, 고민, 합당한 불만의 결과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주류 정당들은 그런 불평불만들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것이다. p.42
사회 위계질서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백인 남성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소수자로 밀려나는 일’,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나 소수민족보다 자신들이야말로 차별의 희생자라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한 공적 담론의 요구가 그들을 압박한다고 느낀다. p.43
* 나에게 적용하기
하나. 나의 삶이 많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잊지 말고, 겸손하고 친절하기(적용기한 : 지속)
두울. 사회이슈에 지속적으로 관심갖고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적용기한 : 지속)
* 기억에 남는 문장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51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매력적이다. 그 중 두 개는 능력 우선 채용에서 ’바람직하다‘고 본 효율성과 공정성을 원칙화한 것이다..(중략)..오직 각자의 능력대로만 보상하는 시스템은 공정성을 갖는다. 오로지 실제 성취만으로 사람들이 구별될 뿐, 다른 어떤 기준으로도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p.66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p.67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p.78
그러나 선한 것과 위대한 것이 꼭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람이든 나라든 정의로움은 정의로움이고, 부와 권력은 부와 권력이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강대국이 꼭 정의롭지는 않으며,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나라들이 꼭 강력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p.88
야스차 뭉크의 지적처럼, 이제 책임이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이자, 그렇게 못할 경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p.116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p.199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 하이에크 p.207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중략)..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응ㄹ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p.282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p.285
생산성은 올랐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품 가격에서 갈수록 더 적은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경영자와 주주이 몫은 점점 더 많아졌따. 1970년대 말 주요 미국 기업 CEO는 일반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2014년 그것은 300배로 늘어났다. p.307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p.309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 p.326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p.343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라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p.349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p.353
'정의란 무엇인가'를 집필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간이 발간되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총 7개의 chapter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의 주제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알게 모르게 관념화되고 불편하지만 그대로 묻고 가는 내용들에 대해 냉철하게 하나하나 문제를 짚어가고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언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부조리함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