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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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440쪽 | 682g | 140*210*30mm |
ISBN13 | 9788974431334 |
ISBN10 | 8974431335 |
발행일 | 2020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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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440쪽 | 682g | 140*210*30mm |
ISBN13 | 9788974431334 |
ISBN10 | 8974431335 |
여는 글: 왜 ?독재자 이승만’ 평전인가 5 1. 젊은 날의 이승만, 출생과 성장 격동기에 태어나 서구사상의 세례를 받다 17 / 언론인 및 개혁정치가로 성장하다 30 2. 일신의 영달을 앞세운 ‘겉치레’ 독립운동 초기 외교활동의 실패 그리고 미국 유학 59 / 짧은 귀향, 긴 미국 생활 79 / 일신의 영달에 기운 교포사회의 ‘문제아’ 이승만 88 3. 분열을 부른 야망, 순진한 외교주의 탄핵당한 임시정부 대통령, 현실성 없는 외교독립론 109 / 태평양전쟁기의 외교활동과 독선에 따른 과오 138 4. 자주독립 민족통일을 외면한 권력의 화신 해방정국의 주역으로 등장, 분단정부 수립에 올인 161 / 권력에 눈멀어 ‘민족’을 외면한 ‘또 다른 반역’ 189 5. 실질 없는 허세만 일삼다가 전쟁을 부른 무능 대통령 반민주폭압체제 구축하면서 민족민주세력 제거 211 / 백범의 암살 배후, ‘보이지 않는 손’ 이승만 226 / 6·25 전쟁, 피난 수도에서 민주주의 압살 257 6. 상상을 뛰어넘는 정치의 모든 악행, 그리고 파멸 기발한 꼼수 정치로 권력 연장 291 / 막장으로 치닫는 정권, 망령 들어가는 독재자 320 / 정치보복의 극치 ‘조봉암 처형’의 내력 352 7. ‘검은 머리 미국인’ 이승만의 슬픈 귀거래사歸去來辭 파멸의 무덤을 판 늙은 독재자의 권력욕 375 / 혁명의 불길에 ‘껍데기’로 사그라진 독재자 392 에필로그: ‘독부’ 이승만이 민족반역자이자 민주반역자인 증거 411 / 이승만 연보 418 / 주註 424 |
각설하고, '리 박사(이승만은 살아생전에 자신을 '리승만, 리 박사'로 부르길 좋아했다)'가 '독립운동가'였다는 허구를 밝혀내고, 자랑스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부터 다짜고짜 밝혀보고자 한다.
1.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 활동을 하던 중에 박영효 등과 공모해서 고종을 폐위하고 공화정부를 세우려는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다 1904년 8월 9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도움으로 5년 7개월 만에 조기 출감했다. 출감 후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 교장을 지내다 미국에서 열린 '기독교국제회의'에 참석하려고 미국으로 갔다. 이때 이승만을 총독부에 출국 주선한 이가 바로 미국인 감리교 감독 헤리스였다. 유명한 친일파였다.
2. 한미수호조약 이행을 촉구하는 외교에 실패하고 그 길로 미국에 눌러앉아, 미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선과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해 유학생이 되었다. 하버드 재학 시절인 1908년,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재판통역을 의뢰 받았지만,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며 거부해 교민사회의 분노를 샀다. 이후에도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열투쟁을 '테러'라고 비난했다.
3. 한국이 일제에게 강제병탄된 지 한 달여 만에 귀국을 해서 'YMCA 학생부/종교부'의 간사로 2년간 근무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민족문제, 독립문제는 외면한 채 수많은 학생들에게 수시로 반일운동보다 해외유학이 더 낫다는 발언을 했다.
4.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작해서 '신민회'를 와해 시킨 '105인 사건' 와중에 친일 미국인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유히 출국했다. 당시 총독부는 독립운동 전력이 있는 인사들을 모조리 검거해 수사를 벌였던 터라 이승만도 당연히 검거되었어야 했는데도 말이다. 이때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국외로 망명했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워싱턴포스트>와 한 회견에서, "일제의 통치를 받은지 불과 3년 만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벼노했다"라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박용만의 주선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5. 당시 하와이에는 교민 8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한인사회에서 '트러블 메이커'였다. 우선 교민의 상당수는 그가 '105인 사건'을 피해 도망왔다고 불만을 토했다. <태평양잡지>를 발행한 이승만은 독립지사들의 무력항쟁과 의열투쟁을 비판하여 교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주도권 싸움을 벌여 교민사회를 분열시켰고, 무장투쟁론을 반대하여 박용만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에는 관심없고 정치권력만 탐하는 정치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6. 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 시도했으나 좌절되었고, 윌슨 미대통령과의 면담도 좌절되었다. 대신 상하이 한국독립당 김규식이 참석해서 한국의 독립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측근인 정한경을 통해서 '한국을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게 해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3·1운동 뒤에도 <뉴욕타임스>에 일본 대신 미국의 통치를 요청했다. (이승만이 과연 독립운동가인지 의문시 되는 이유다. 그는 한국의 독립보다는 '강대국의 위임통치'를 강력히 원했다. 훗날에는 일제의 통치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이 '권력'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형태의 '나라꼴'이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7. 3·1운동의 영향으로 설립된 여러 '임시정부' 가운데 이름뿐인 '한성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된 그는 '집정관총재직'을 받고서도 대통령 행세했으며,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고도 미국에 머물며 내내 '대통령'으로 행세했다. (이승만의 권력욕이 얼마나 집요한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8. 상하이임시정부의 수반을 맡고서도 미국에서 '외교독립론'을 실행하고 있다며 '독립자금'만 낭비만 하며 임정의 내분을 잔뜩 키우던 차에, 1920년에 드디어 상하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치지도력을 발휘해 내분을 잠재우기는커녕 내분만 더욱 격화시킨 끝에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가 현실성없는 '외교독립론'만 고집했다. 그런 와중에 1922년 하와이에 들어가서 강연을 할 때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모범적이다"라는 찬양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고,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는 망언까지 했다. 이 망언을 하기 전에 그는 일본총영사관과 교섭 끝에 '일본 여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명색이 '임시정부 대통령 신분'으로 말이다. (일제도 그가 임정 대통령 행세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일본 여권'을 내준 까닭이 무엇일까?)
9. 1922년 6월 17일,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력직에서 탄핵한다. 탄핵이유는 '독선적 행위와 독립기금의 사적 유용 등 5개 항'이다. 또 임정은 1925년 4월 10일, 이승만이 위원장으로 있는 '구미위원부'를 폐지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여 임정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 하와의 '한인 사회단체'를 자기 중심체제로 바꿔 교민사회를 분열시키고, '대한인동지회'를 개편하여 자신을 '종신총재'로 추대했다.
10. 1923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난하며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그는 이 의거가 한국독립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는 것이 없다면서 미국신문 <크로니클>에 이유를 밝혔다.
11. 1944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려 노력하는 장개석의 요구에 영국과 미국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이유는 김구가 이끄는 '충칭임시정부'와 이승만이 이끄는 '미주 한인사회' 등등등등 한국을 독립시켜 주었을 때, '통합의 주체'가 되어줄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구는 '미국'과 인연이 없어서 의문이었고, 이승만은 '한인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트러블 메이커였기 때문에 '미국'마저 이승만을 달가워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이승만은 별도의 '임시정부'를 설치하려다 교포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12. 1945년 7월 말, 이승만은 태평양전쟁을 이끄는 맥아더에게 전문으로 강력한 반소/반공 입장을 전달해 맥아더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의 항복 직후 맥아더 면담에 성공한 이승만은 맥아더의 주선으로 9월 16일에 미 군용기를 타고 미군 장교 복장을 하고 귀국했다. 그에 앞서 이승만은 1941~42년에 미국의 주도로 방송한 '미국의 소리'와 미 정보조정국의 요청으로 방송한 '한국어 단파방송'에 목소리를 실어보낼 기회를 통해서 '이승만은 미국이 지원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퍼뜨리게 된다.
13. 혼란한 해방정국속에서 남북협력을 외치는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노력을 허사로 되돌리는 일만 해댔다. 1946년 6월 '정읍발언'을 시작으로 '남한단독정부' 수립에만 매달렸다. 결국 1948년 5·10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치뤄지고, 이승만은 다른 후보였던 '독립운동가 최능진'의 입후보를 방해하며 '단독출마'에 성공하고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훗날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최능진에게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씌워 총살했다.
14. 제헌헌법의 내각책임제 시안을 억지를 부려서 대통령중심제로 바꾸게 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권력강화에만 열을 올렸고,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서는 친일분자를 중용하며 '독립지사'를 향해 정치보복을 일삼았다. 김구 암살, 국회 프락치 사건 조작의 배후로 이승만이 지목되었다.
15. 제주 4·3 사건 때, 관련 법률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3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적정 제거와 언론 탄압에 활용했다.
16. 이승만 정권은 국방안보에 소홀히 하면서도 말로만 '북진통일'이라는 허세를 부리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한국전쟁 발발'을 초래하고 방어하지도 못했다. 또한 서울시민을 속인 채 맨 먼저 후방으로 줄행랑을 치는 등 무책임한 행동만 일삼다가 죄 없는 시민들만 무참히 학살했다. 이유는 '공산당일지도 모른다'라는 죄목이었다. 이때 희생당한 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서도 많이 학살 당했지만, 미군은 물론이고 국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우익세력,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에 의해 엄청난 학살을 당했다. 이 시민들은 이들에 의해 잡혀가면서도 저항 한 번 하지 않았다. 설마 '같은 편'이 자신을 죽이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런 와중에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민주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17. 1950년 7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을 보내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하면서 '시효'도 명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휴전협정 당시 맹목적인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휴전협정에서 제외되어 주권을 포기한 결과를 초래했다. 지금까지 북한이 회담주체로 남한이 아니라 미국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18. 1954년 7월 28일, 미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을 하면서 한국군 20개 사단을 선봉으로 세우겠다고 밝혔다. 이에 <워싱턴포스트>는 '불행한 연설'이라며 비판했고, 이승만 역시 나중에 "일생일대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고백했다.
19.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소비재 원조에만 의지한 채 아무런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정치경제적 무능력을 보이자 '대미종속화'가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반공독재체제'를 강화하고, '평화통일론'을 탄압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통일을 가장한 통일 방해론이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이 무렵 극심해진 언론의 비판에 이승만은 결국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하는 조치를 취하고 만다. 언론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20. 무투표로 취임한 '초대 대통령', 한국전쟁의 혼란속에 '발췌개헌'으로 대통령직선제로 선거방식을 바꿔 연임에 성공한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에도 성공하고, '3·15 부정선거'로 4선을 넘어 영구집권을 꾀했다. 그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으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민주적인 수법'도 서슴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땅에 떨어져 전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했으며, 영국의 언론에서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일은 절대 없다"는 비아냥까지 실어보냈다.
드디어 일어난 '마산 항쟁'을 시발점으로 전국적인 항쟁이 들끓었으며 4월 18일 밤, 서울에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깡패 이정재'에게 두들겨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날, 서울대 학생의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온 서울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시위에 나서자 '4·19 혁명' 전국적으로 울려퍼져 나간 것이다.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을 치루고 나서야 4월 26일에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길'에 올라 그곳에서 죽었다.
(이책, 411쪽 ~ 417쪽에 적힌 글을 '인용'하며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임)
이상 '20가지 근거'를 들어서 이승만의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볼 수 있겠다. 역사가들의 흔한 평가는 '2:8'이라고 한다. 이승만이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을 위해 한 업적을 '2'로 보고, 그 반대로 '친일행적'과 '독립운동 방해한 반민족적 행위', 그리고 '대한민국 민주정치를 저해하는 반민주적 행태'를 뭉뚱그려 '8'로 본 견해다. 이런 이승만을 두고도 '국부(father of his country)'라고 칭송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안 봐도 '반민족적/반민주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난 어릴 적에 '초대 대통령'의 멋진 모습을 그렸다. 어릴 적에 방송에서 곧잘 이승만의 성대모사를 한다면서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한창 '반공교육'을 받던 시절이라 김일성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나라를 지키고,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온 국민이 온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라사랑'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이승만 위인전'을 찾아 읽기는 힘들었다. 집에 '위인전집'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도 있었으나, 어른들이건 선생님이건 그 누구도 '이승만 위인전'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제가 없으면 밖에서 나가 노는 것이 하루 일과였던 어린 시절이라 그렇게 '이승만'은 잊혀졌다. 그리고 나이가 점점 먹으면서 '이승만'의 본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4·19 혁명'을 알면 알수록 이승만은 나쁜 독재자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나쁜 이유'까지 소상히 알기는 힘들었다. 학창시절 내내 그 누구도, 어떤 책에서도 '이승만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사시간'에도 현대사는 배우질 않았다.
그러다 이승만의 실체를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촛불혁명'이 성공한 이후로 '금서'로 묶여있다가 풀려난 것처럼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방송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자, 이승만의 실체는 위에 열거한 '20가지' 말고도 더 많다. 하지만 '논란중'인 것을 빼고도 저만큼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어떠해야 할까? 독립운동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근거가 빈약하다. 그저 시류에 맞게 처신하는 것에 그쳤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비유일 것이다. 그가 '개화세력'과 함께 구국운동에 힘을 보탠 것은 맞다. 서재필과도 친분을 갖고 '독립협회'에서도 활약을 했다. 하지만 '고종 폐위 사건'에 연류되어 구국지사들과 모진 고문을 한 차례 받고 5년 넘게 감옥 생활을 한 것 말고는 별다른 활약이 없다. 오히려 하야시 곤스케와 친일 미선교사 헤리스의 도움으로 조기출소한 뒤부터는 '친일파'처럼 행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승만은 왜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권력욕'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는 '왕가의 후손(전주 이씨)'으로 태어났지만, 이미 몰락한 한미한 집안이었기에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을 경험한다. 그러다 배재학당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 실력으로 중추원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구국활동을 벌이다 감옥행이 되고 말았다. 모진 고문을 받은 경험이 그에게 '강력한 힘'을 갖고 싶어하는 원동력이 되었을까? 힘 있는 자의 도움으로 출소도 하고, 유학길에도 오를 수 있어서였을까? 암튼, 그는 일생을 '힘 있는 사람과 국가'에 빌붙어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역점을 두게 된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외교독립론'을 고집하게 된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찬밥 신세를 맛본 뒤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방법임에도 이승만은 고집스럽게 밀어붙인다. 그 때문에 '무장투쟁론'을 벌이던 박용만과 김구 등에게 날선 적대감마저 드러내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외교독립론'을 내세우며 이승만은 어떤 이득을 얻었을까? 결코 '조국의 독립'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승만의 독립 노력(?)은 매번 헛다리만 짚기 일쑤였고, 심지어 미국의 동의조차 얻어내지 못했다. 더 웃긴 것은 '일제'에게까지 '외교독립론'을 구걸했다는 사실이다. '식민통치'를 인정할 테니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했다. 미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게 그랬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치고, 이미 '식민통치'를 하고 있는 일제에게 빌붙어서 '위임통치론'을 주장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냔 말이다. 십중팔구 '조선총독직'에 자신을 앉혀달라는 욕심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그야말로 '권력욕의 화신'인 셈이다.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미국인이나 교포 들에게 '트러블 메이커'로 정평이 나있는 상황이었다. 하와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서도 그랬다. 그런 이승만이 '해방정국'에 대통령후보감이 된 까닭은 그가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했으며 미국과 연줄이 있는 인사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만해도 '영어'를 능통하게 할 줄 아는 인물이 많지 않았고, 할 줄 알더라도 미 대통령과 면담을 할 정도의 명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 두 가지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이승만의 발빠른 행보도 한몫 단단히 했다. 그의 발빠른 행보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누구보다 먼저 냅다 도망친 것으로도 증명이 되지만, 해방이 가까워진 것을 눈치챈 그는 당시 '극동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연줄을 대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반공주의자'로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았다. 이렇게 빠른 변신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에게 투철한 사명감 따위는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게 '해방공간'에서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발빠르게 세력을 규합하며 정적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여운형, 조봉암, 그리고 김구 등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재치고 '초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참으로 대단한 권력욕이고, 대단한 처세술이다. 하지만 '권력'을 차지하는 능력은 출중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형편 없었다. 그의 '반민주적 정치행보'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하와이에 머무를 당시에 '정치세력'을 규합해서 '무장투쟁론'을 내세우던 박용만을 제거한 것을 시발점으로 자신과 '권력경쟁'을 다투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처단했다. 초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독립운동가 최능진'이 입후보도 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2년에는 '대통령간선제'로는 당선될 가능성이 없었다. 이미 야당탄압이 극심했고, 반민주적인 방법으로 정치를 일관했기 때문에 '대통령감'으로 무능력하다는 것도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획책한 것이 '발췌개헌'을 통해서 대통령직선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전시에는 '직선제'라도 '간선제'로 바꾸어 진행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이건만,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자리에 다시 오르기 위해 '선거방식'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리고 야당후보의 선거유세도 '정치깡패', '관제데모' 등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방해하여 자신만 유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높은 득표율로 '연임'에 성공하였다.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나라꼴'을 우습게 만든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대표적인 것이 '휴전회담 반대성명'이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얻은 것은 '이승만의 대통령직' 뿐이었다. 휴전선언문에 서명도 하지 않아 '주권'을 빼앗겨버려 전쟁당사국이면서도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 지나도록 국민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게 만들 정도로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미국의존도는 점점 높아졌고 '미국의 원조'가 끊기면 온 국민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서도 '대통령 3선'을 하기 위해 헌법을 날조하였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의원들의 개헌투표결과 '135표'로 정족수 미달이 났으므로 '부결'이 났는데도, 대통령과 자유당 의원들은 서울대 수학교수를 모셔다 놓고 '수학강의'를 청한다. 203명의 의원수 가운데 2/3에 해당하는 수는 135.33333 이므로 반올림을 하면 '135표'도 정족수 충족이 되므로 '가결'이 되었다고 발표를 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사오입 사건'이다. 그로 인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에 나갈 수 있다고 헌법을 입맛대로 고쳐버렸으며, 역시 '정치깡패' 등을 앞세워 3선에 성공하게 된다.
이 시절이 그 유명한 '자유당 정권'이다. 이때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부통령 이기붕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박근혜 옆 최순실처럼 정치일선에 감놔라 배놔라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부정부패가 극에 다다르고 정치청탁이 물밑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던 시절이다. 나라꼴이 더 우스워진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미국에서조차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형편없는 정치로 온국민을 괴롭히던 '독재자'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하기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바로 '3·15 부정선거'다. 얼마나 부정이 심했냐면 '비밀투표'가 아니라 '공개투표'일 정도로 노골적으로 '이승만 대통령만들기'를 시행했다. 이미 부패할대로 썪은 정관계 인사들은 너나할 것없이 권력에 빌붙어 '이승만 떠받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투표함 바꿔치는 장면'이 들통나고 말았다. 당국은 그런 일은 없다고 발뺌 했지만 '투표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부정행위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체 유권자수'보다 더 많은 표를 이승만이 득표했기 때문이다.
이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마산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총과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강제진압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러다 시위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이 눈두덩에 박힌채로 강위로 떠오르자 학생들은 동료의 죽음에 분노해 다시 시위를 벌였다. 이때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고,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음에도 시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 많은 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결국 서울에도 시위의 물결이 밀려오자 학생들은 서로의 어깨를 둘러메고 거리를 점령해나갔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와 학생들의 사상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점점 거세져만 갔다.
그러다 4월 18일 밤에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사이에 '정치깡패' 이정재에 의해서 두들겨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음날 아침에 이 소식이 전역에 알려지고 서울대 학생의 '시국선언문' 낭독을 시작으로 서울 전역의 학생들이 물밀듯이 밀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과 총을 쏘며 해산을 시도했고, 그 과정중에 학생들이 총탄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모습을 본 서울시민들까지 합세하며 시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사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이승만과 그 일당들은 '계엄군'을 출동시켰지만, 그들의 기대대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자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타서 "이승만 물러나라"를 외쳤다. 다급해진 이승만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서울의 대학살'을 지켜본 미국은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는 성명을 내면서 동시에 이승만의 정계 은퇴를 시사했다.
이지경에 이르고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이승만은 4월 26일 10시 20분경에 학생/시민 대표와 면담하면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며 하야 의사를 밝혔다. 이날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대통력직 하야를 녹음 방송했다. 하지만 이날까지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여 사망 24명 부상 113명이 발생하여 국민들의 분노를 식을 줄 몰랐다. 만약 대통령 하야 성명이 발표되지 않았다면 이날 '경무대'는 분노한 시민들에게 포위되어 변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날, 부통령이던 이기붕 일가족이 '집단자살'을 하였고, 이승만은 이 광경을 모두 훑어본 뒤에 '이화장'에 칩거했다고 한다. 그리고 단 한 번도 12년의 폭정과 4·19 학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이런 이승만을 두고 어찌 명예롭다 할 수 있겠는가. 그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독재자'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그는 일생을 '권력의 화신'으로 살았고, 민족의 배반자로 살았다. 그 때문에 수많은 희생을 당한 억울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냔 말이다. 특히, '김구 암살',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동안 벌어진 모든 비극적인 일들은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다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죄값을 받지도 않고, 국민에게 사죄하지도 않은 채 너무나도 평온한 죽음을 맞았다. 심지어 그를 위해 눈물까지 흘리는 국민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아..정말 너무나도 착한 심정을 가진 국민들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쓴 리뷰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이전에 출간했던 <독부 이승만 평전>의 개정판이다.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라는 부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평생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추구해온 ‘독재자 이승만’의 진면목이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다. 저자는 이승만의 행적이 대의명분보다는 평생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회주의적인 것이었음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역사를 다룬 여러 문헌들에서, 이승만의 자기중심적인 처사로 인해서 독립운동 진영에 오히려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는 사실들이 적시되어 있다. 저자는 어느 일방의 자료에만 근거하지 않고, 이승만의 공과를 냉철하게 판단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의 삶을 평전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이승만의 젊은 시절부터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중 폭압에 맞서 저항한 국민들에 의해 쫓겨나 하와이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첫 번째 항목인 '젊은 날의 이승만, 출생과 성장'에서는 조선 말기의 '격동기에 태어나 서구사상의 세례를 받'았던 그의 젊은 시절의 행적과, ‘언론인 및 개혁정치가로 성장'하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조국의 독립보다는 '일신의 영달을 앞세운 겉치례 독립운동'을 내세웠던 진면목을 두 번째 항목에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근대사를 서술했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승만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전 책의 제목을 '독부(獨夫)' 즉 볼불장군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승만의 독재가 극에 달하던 자유당 말기에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은 그를 일컫어 ‘독부 이승만’이라 지칭했다고 한다. 저자 역시 그러한 평가에 공감하기에, 처음 그의 평전을 쓰면서 <독부 이승만 평전>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평생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미국에서 취득한 '박사'라는 호칭과 여론, 그리고 악랄한 친일파들까지도 받아들였던 이승만의 용인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가정을 내세우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하지만, 만약 우리 근대사에서 이승만이 없었거나 그 존재가 미약했다면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두 번이나 탄핵을 당한 대통령, 바로 이승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자신의 유명세에 힘입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보다는 자기 정치를 하면서 동포들을 분열시키는 행태를 보고 한 번의 탄핵을 당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임시정부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호칭으로 소개하면서, 미국에서도 동포 사회의 분열을 조장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특히 미국인으로서 일본의 고문을 맡아 친일적인 행동을 하던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의 변론을 부탁받았으나,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안중근 의사를 비난하고, 미국 사회에서 동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한 박용만을 배척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에 골몰하였던 행적이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는 이승만의 이러한 행태를 '분열을 부른 야망, 순진한 외교주의'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항목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에 영합해서 권력을 쥐고, 친일파들을 비호하면서 부정선거를 저질러 이승만은 두 번째 탄핵을 당해 미국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최근 이른바 뉴라이트로 활동면서 '신친일파'로 자처하는 이들이 '이승만학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사에서 이승만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파악된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독재와 친일이라는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깊이 인지하게 되었다.
이승만식 폭압 통치나 형편없는 국정 운영, 장기집권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면, 그의 '국부' 추대를 위한 수구세력의 재평가 '작업'은 어떤 의미로도 용납될 수 없다.(저자의 '여는 글'에서) 아마도 위의 문장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을 초래한 이승만은 해방 이후 미군부측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장 먼저 고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과 미국에 의해 분단의 조짐이 있었던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지만, 권력욕에 눈이 멀었던 이승만은 미군부와 친일파들의 도움으로 서서히 자신의 권력욕을 드러내었다. 저자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일컬어 '자주독립 민족통일을 외면한 권력의 화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해방 정국에서 통일정부가 아닌 분단정부 수립에 몰입하고,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집착해 이미 마련된 헌법의 초안까지 자신의 뜻대로 바꾸는 등 '권력에 눈멀어' 벌인 다양한 행적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가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에 반대하며, 끝내 해산을 하도록 만든 원인에는 그 자신이 친일파들에 의해 명멱을 유지하는 신세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 ‘영구집권’을 꿈꾸면서 정적들을 탄압하고, 무능한 인물들에 둘러싸여 결국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던 이승만의 행적을 통해 역사적 냉철한 평가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차니)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YES 24에서 모집하면서 소개하는것을보고 , 포스트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았습니다 .
음 , 개정증보판으로 양장본으로 나왔었는데 ,판매가 중지된 모양이군요 ?
01 젊은 날의 이승만, 출생과 성장
02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겉치레’ 독립운동
03 분열을 부른 야망, 순진한 외교주의
까지 봤습니다 . 대충 내가 이해한 대로 써보겠습니다.
(계승권없는)왕족 출신으로 ,
합격자가 정해져있어서, 과거 봤다가 실패하고 , 야망을 품었다 는 점에서,
유현덕이 떠올랐지만, 그와는 반대로 , 부유한 엘리트 출신 이었다고 합니다.
애들 모아 가르치고 , 신문 기자 노릇하며 명성 쌓아서 , 엘리트 들만 들어가는 중추원
- 사극에 나오는 젊은 유학자 들 인가 ?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왕 을 똑똑한 왕자에게 물려주라고 했다가 , 정치범 으로 들어가,
탈옥시도 하고 , 교도소 에 수감되어 , 기독교 신앙생활로 , 죄수들에게 전도하고 ,
감옥에서 신문기사 들을 하며 , 독실한 크리스천 이 됬고 , (종신형 ->약 6년 만에 사면)
-일진회 라고 하는 , 친일 개화파 들 과 관련있었고 , (일진회 ???? )
일진회는 일본에 병합된 뒤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러일강화회의때 사신으로 미국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난뒤,
거기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5년만에 끝냈다고 합니다 .
한성 임시정부 생길때 , 국무 총리 하라하자 , 대통령 시켜달라고 우겨서
대통령이 되자 ,다 보고 하고 하라 하고 , 그럴거면 와서 일 하라 하자 ,
거기 돈없다고 돈보내달라는거 못보내주고 , 기책을 원해도 못 주자 내탓한다고
신문에 내고 , 해고 당한뒤 , 내각제로 다시 바꼈다고 합니다 .
-그리고 내가 조선의 대통령 스티ㅂ.... 승만 리 라고 소개하고 다녔다고 ,
독립 운동가 라기 보다는 , 외교관이나 선교사 였고 ,
자신의 안위 와 명예욕을 우선시 하기 때문에 리더로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