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체에 매혹되거나 설득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파편이다. 파편이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하다.
--- p.5
야구를 좋아하는 자에게 세계는 낭만적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건조하고, 산문적이며, 고독한 세계다. 그것은 은둔지다.
--- p.15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는 신비감이 동반된다. 다른 길이 아니라 그 길로 가서 살았거나, 그 열차가 아니라 다음 열차를 타서 살았다는 것. 왜 그 길로 갔으며, 왜 다른 열차를 탔는가?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로 (그들이 죽었고) 내가 죽지 않았는가? 왜 나는 구제되었는가? 왜 그 질병이 나를 빗겨갔는가? 해답이 있기 어렵다. 생존은 해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 p.25
아이는 자란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맹렬하게 자란다.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 아이의 성장을 기뻐하는 사람의 눈에 아이는 결코 ‘존재’하는 누군가, ‘실존’하는 누군가가 아니다. 아이는 자라고 있다. 이 변화와 생성을 지각하고 기뻐하는 힘이 사랑이다.
--- p.36
쓰는 자는, 오직 미래에만 현재화될 미지의, 다수의, 통제 불가능한 해석 상황들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하나의 문장에는, 미래에 누군가 그것을 읽을 때 그들의 의식에 발생하게 될 새로운 촉발, 감상, 생각, 감정의 가능세계들이 응축되어 있다.
--- p.49
감염의 상상계. 잠복기까지의 기다림. 감염되었는지 감염되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의 불안. 혹은 건강검진을 받고 난 후 결과를 기다리기까지의 시간. 이들은 모두 의학적 패러다임의 연옥이다. 불안 속에 지내다가 결국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는 의사의 복음과 더불어 회생하는 삶. 반복되는 부활.
--- p.52
초연결사회의 참된 도덕성은 단절의 능력에서 발견된다. 얼마나 깊이, 진지하게, 창조적으로 끊어질 수 있는가? 끊어짐과 연결됨 사이에 얼마나 생동감 있는 리듬을 설계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우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은둔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p.55
파상의 핵심에는 세계의 가상성과 주체의 가상성의 동시적 파괴가 있다. 파상은 단순한 환멸이나 실망이 아니다. 그것은 환멸이나 실망을 통한 자아의 변형이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적, 실체론적 주체의 파괴적 변형.
--- p.77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신, 그 아들과 함께 죽어가는 신의 모습은 ‘종교’라는 단어를 그 근본의 자리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사제와 교리와 의례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의 문제다.
--- p.86
좋은 글은 미문이 아니며 악문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지나치게, 과도하게 아름답거나 혹은 아주, 지나치게, 과도하게 추한 글이다. 핵심은 균형이 아니라 힘의 강도에 있다. 좋은 글은 움직이고, 변형시키고, 불붙이고, 흐르게 하고, 쏟아지게 하며, 뒤집는다. 좋은 글은 감응이다.
--- p.116
사회는 꿈이다.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과 암시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 p.159~160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 p.209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virion 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 p.223
우리는 멀리 있는 흉악범보다 주변의 저열한 인간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범죄행위보다 에티켓의 실수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를 가장 분개시키는 것,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다.
--- p.261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 우리가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들. 살았다 한들 패배하고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을지 모르는 길들. 이들의 총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만 삶과 만날 수 있다.
--- p.318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