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같은 인류의 오래된 비례적 정의관에 닿아 있기 때문에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다. 능력주의에 대한 연구들 중 상당수가 능력주의를 가장한 세습주의, 사이비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결론에 가서 ‘진정한 능력주의’를 요청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그만큼 떨쳐 내기가 쉽지 않다.
--- p.9~10, 박권일, 「여는 글 : 불평등과 특권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의 역설」 중에서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비유는 달리기 등의 경주이다. 이때 우리는 출발선(기회)이 같았는지, 규칙(과정)은 공정한지, 이로부터 도출된 서열과 승패(결과)가 정당한지를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나 삶은 개개인이 참가하는 경주나 시합이 아니다. 경주나 시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사회와 삶 전체를 경주로 보면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속도와 기록을 재기 위한 시험과 평가로 생애를 채워 나가야 한다. 불필요한 경쟁과 무의미한 고통이 다수에게 요구된다. 이에 집중하다 보면 평가와 차별의 룰을 만들고 시행하는 권력은 가려지게 된다.
--- p.31, 공현, 「교육에 필요한 것은 탈능력주의」 중에서
20세기, 의무교육 제도가 확산되고 사회에서도 사람을 선발 배치하면서 동서양에서 능력주의를 작동케 하는 가장 일반적인 기제는 시험이었고, 능력의 현실태는 점수였다. 21세기 오늘날은 시험과 시험 결과가 점점 세계 공용의 언어로 표기되고, 세계 어디서나 성적표들이 통용되고 있다. 능력의 현실태인 점수는 인간을 오직 하나의 비교 값으로 투명하게 만든다. 한 인간을 둘러싼 가문, 경력, 사상 같은 온갖 요소들을 제거하고 오직 점수로 본인 자신과 혹은 타인과 비교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사람들은 점수를 보면 한 개인의 능력을 직관적으로 안다고 생각하고 신뢰한다. 이게 점수의 위력이고 숫자화된 점수의 마력이다.
--- p.37, 이경숙, 「시험/평가체제 속 인간과 교육받을 권리」 중에서
능력주의는 현 체제 내에서 모든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모든 결과물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자격에 기반한다고 믿게 한다. 교육은 이러한 믿음을 공고하게 한다. 현수도 12년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부의 불평등과 빈곤을 공정하고 정당하며 바람직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교육을 통한 사회 이동이 가능하다고 배웠고 개인의 노력을 보상하는 정책들이 공정하다고 배웠기에, 성공 여부는 동등한 기회와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것이고 운이나 출생·성장 환경과 같이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 p.88, 정용주, 「현수는 개인의 능력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중에서
지식 자본주의 시대에는 지식이 환금성을 갖게 되면서 학벌은 정규직 고소득 전문직종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학벌은 능력주의 사회의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학벌이 ‘빼앗기’보다 ‘지키기’를 위한 방어적 수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상승의 욕망보다 하강의 공포가 더 커진 상황에서 학벌이 사다리를 오르는 수단이 아니라 사다리를 걷어차는 수단이 된 것이다. 학벌없는사회 해산 당시 엄기호는 대학 서열에서 하층부는 붕괴하고 있지만 상층의 학벌 구조는 더욱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권력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전 시기 학벌 경쟁의 추동력이 한 계단 더 오르려는 상승의 욕망이었다면, 지금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하강의 공포가 경쟁의 동력이다.
--- p.116~117, 채효정, 「학벌은 끝났는가」 중에서
공정성에 대한 집착과 능력 강조는 현실에서 ‘능력자에 대한 우대’라는 차원보다 주로 ‘탈락자·소수자·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형태로 발현된다. 사실 능력이란 개념은 모호해서 어떤 탁월성을 명확히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은 명확하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을 찾기는 쉽다. 그런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곧 자신의 지분을 지키는 일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다. 그래서 공정성 내전은 금세 공정의 탈을 쓴 혐오 담론이 되고 만다. 소수자·약자 혐오를 추동하고 지속시키는 핵심 동기 중 하나가 바로 능력주의다.
--- p.145, 박권일, 「능력주의 해부를 위한 네 가지 질문」 중에서
점차로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좋은 일자리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지면 노동자들은 시험에 매달리게 된다. 이미 학생 때부터 경쟁을 당연하게 겪으며 살아왔기에 오로지 시험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청년 정규직이 ‘공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사회가 불공정하기 때문에 자신처럼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통해서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 시험마저 의미가 없어지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자신이 노력하고 고생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격렬하게 반대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 p.176~177, 김혜진, 「차별받는 노동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중에서
이런 모습은 능력주의의 부정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성공을 오로지 개인의 내재적 능력과 노력의 결실로 간주한다. 2020년 8월 14일 거리 집회에서 나온 박지현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의 “교과서 사는 데에 10원 한 푼 보태 준 적 없는 정부”라는 발언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의 파워 엘리트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 주었다. ‘내가 내 돈 내고 내 의지로 열심히 해서 얻은 나의 지위인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사회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가!’
--- p.194, 김혜경·문종완, 「의사들의 엘리트주의 그리고 어긋난 정의」 중에서
성별 격차나 젠더 갈등은 사실상 ‘청년’이라는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범주 외부의 의제로 다루어진다. 한국 사회의 무한 경쟁 체제에서 ‘청년 세대’가 경험하는 소진에는 사회적으로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로 상정하는 것과는 달리, 청년 여성이 노동하면서 경험하는 직장 내 성차별은 상이한 층위에서 다뤄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년-여성이 경험하는, “끊임없는 경쟁과 자기계발 속에서 ‘개인’으로 성공하기를 요구받지만 동시에 구조적 차별과 폭력의 기제로서의 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청년 세대 여성들의 모순적 삶의 지형”은 페미니즘을 요청하게 된다.
--- p.206~207, 이유림, 「뛰어난 여성들은 자신의 파이를 구할 수 있을까」 중에서
우리에겐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에게 거리낌 없이 “너는 1등급이다”, “너는 9등급이다”라고 규정한다. 지적 인종주의의 광폭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규정이 얼마나 잔혹한 행위인지에 대한 성찰적 물음은 찾기 어렵다. 가령 1960년대 이전 미국의 버스에서 백인은 앞자리, 유색인은 뒷자리로 구분했던 행태와 얼마나 다른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 p.218, 홍세화, 「닫는 글 : ‘지적 인종주의’ 소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