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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 윤채선

원더우먼 윤채선

걷는사람 시인선-031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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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150g | 125*200*20mm
ISBN13 9791189128975
ISBN10 1189128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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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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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사이 풍을 맞아
말씀이 어눌해진 엄마를 병실에 눕혀 놓고
수발드는 봄날

나물국에 밥 말아 먹은 엄마는
입가에 이팝꽃처럼 붙은 밥알도 떼어 내기 전에
약을 찾고
혈압약, 뇌경색약, 우울증약
인사돌, 영양제, 변비약까지 한 손바닥
가득 쌓인 약 알갱이
두 번에 나눠 삼킨다

내가 빨리 죽어야 니가 고생을 않을 텐데
말로만 그러고 죽을까 봐 겁나서
꽃잎 삼키듯 약을 삼킨다

병실 창밖 한티재에는 산살구꽃도 지고
마구마구 신록이 돋아나는데
엄마가 오래오래 살면 어쩌나
봄꽃 지듯 덜컥 죽으면 어쩌나

내 마음이 꼭 봄바람처럼
지 맘대로 분다
---「봄바람처럼」중에서

오늘 내가 안 가면 엄마는 환장할 것이다
날 이런 데 버려 놓고 와 보지도 않는다고
나는 고만 죽을란다고 내 죽으면 다 편할 일이니
수면제 탁 털어 넣고 죽어불란다고
온 병실 귀먹은 할망구한테도 다 들리게 소리칠 것이다
그럼 한 할망구가 나서서 여보소 김천댁,
아들도 먹고 살아야지 어예 맨날 들따보니껴
나랑 민화투나 한 판 하시더
하면서 엄마를 달랠 것이다
어떤 할망구는 고만 혼자 놀아도 되겠구만 또 저런다
지청구를 할 것이다 이런 참에 내가 나타나면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쁜데 멀라꼬 왔노,
고만 가라, 가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허리며 다리며 아픈 곳을 주워섬기며
에구구구 죽는소리를 할 것이다
그럼 내가 바쁘다고 엄마 보러 안 오나? 하면서
짐짓 효자인 척 엄마 위세를 좀 세워 준 다음
어깨를 주무르며 내일부터는 내가 정말 바빠서
한 며칠 못 온다, 혼자 좀 있어라 하면
엄마는 또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고
괜찮다 일 봐라 돈 벌어야 먹고살지
일 봐라 할 것이다 나는 내일 저녁 무렵에나
몰래 와서 엄마가 뭐 하고 노시나 빼꼼히 들여다봐야겠다
고만고만한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가야겠다
엄마가 너무 시무룩하여 엄마 없는 아이처럼 가여우면
‘짠’ 하고 나타나 병실에 복숭아 통조림 한 통씩 돌리고
엄마 위세나 세워 줘야겠다
그러면 엄마는 또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에 취해
한 며칠 덜 아프게 살아질 것이다
---「밀당」중에서

할머니가 된 원더우먼 린다 카터를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때, 엄마 생각이 났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팽개치면 텔레비전이 있는 마당집에 모여 별무늬 반바지를 입은 원더우먼을 만났다 무적의 원더우먼! 엄마는 하루 종일 밭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안치고 마당에 난 풀을 뽑고 밥을 푸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해서 달빛에 널고 뚫어진 양말을 다 깁고 잠깐 적의 공격을 받은 양 혼절했다가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밥을 안치고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밥을 하고 일을 하고 빨래를 하고 또 밥을 하고 그 많던 왕골껍질을 다 벗겨서는 돗자리를 짰다

린다 카터는 할머니가 되어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받았다 무기는 더욱 강력해지고 그사이 새로 생겨난 영웅호걸들과 어울려 술 한잔하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여전히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약을 먹고 밥을 하고 냉이를 캐고 약을 먹고 콩을 고르다가 밥때를 놓쳐서 아버지에게 된통 혼쭐이 나고 돌아앉아서 약을 먹고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끙끙 앓으며 잠을 잔다 무릎과 입안에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긴 했는데 별 효과가 없다 전동으로 움직이는 슈퍼카를 구입했지만 슈퍼맨을 만나기는커녕 평생 웬수 아버지와 산다 린다 카터는 은퇴를 선택했지만 엄마는 아직도 우리의 원더우먼, 쭈그렁 가슴이 무너져 내려도 별무늬 몸뻬를 입고 혼절한다
---「원더우먼 윤채선」중에서

엄마는 병원에 누워서 제일 먼저
돈 숨겨 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냉장고 밑바닥 물받이에는 오백 원짜리가
장독 밑에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뒤늦게 들어온
이웃 부좃돈이 봉투째 숨어 있었다

오래 비워 둔 집에서는 엄마가 말하지 않은
여러 곳에서 돈이 나왔다
싱크대 깔개 밑에서는 제법 큰돈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돈을 믿고 살았구나

남편도 자식도 아니고
엄마는 돈을 믿고 살았구나
악착같이 돈 모으는 재미로 아픔을 잊고
돈 좀 모이면 니 신세 안 진다
큰소리도 치며 버텼구나
---「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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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겉으로 내보이지 않고 숨기면서 모호성의 문턱에 시를 데리고 가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는 때에 피재현의 시는 그와 정반대의 방향에서 자신의 거처를 만든다. 아예 다 보여 주겠다고 작정한 듯이 벌거벗고 거리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의 손에 확성기는 없고 시인이 자분자분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오로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연약하고 안쓰러운 어머니 한 사람뿐이다. 피재현의 사모곡은 어머니에게 칭얼거리고 싶은 소년의 마음과 닿으면서 적지 않은 물기를 만들어 낸다. 아주 사적인 체험이 보편적인 공감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시인이 애초부터 시를 통해 에헴, 하고 위세를 부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정하고 습도 높은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관계를 탐구하는 시인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말해 준다. 시인이여, 부디 이 핍진성의 엔진을 오래 가동하시게나. 시간이 되거든 안동 풍산 장터의 중국집에 가서 독한 ‘빼갈’이라도 한잔하세.
-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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