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에 생을 거듭하면서 마음과 몸에 내려앉아 잘 지워지지도 않는 많은 때와 스스로 만든 온갖 정신적 굴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을 포함한 모든 타자他者와의 관계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갈등으로 우리의 삶은 순간적 즐거움의 끝에 길기만한 고단한 시간의 연속입니다. 실존 자체가 어리석음과 어둠, 그리고 고통 속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죽음이라는 종결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 온갖 고苦를 떨치고자 일어서는 것, 그리하여 수행자로서 거듭나는 것, 마침내 해탈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본래의 존귀함을 찾고 확립하는 것, 이것이 삶의 제1 과제이자 핵심이라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선결 과제이자 최우선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마자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선포한 바로 그 진리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절박함의 의미입니다. 어찌 절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p.13
여행은 대화인 듯합니다. 여행은 낯선 환경, 낯선 거리, 낯선 시간,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 낯선 존재들은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낯선 만남의 과정에서 스스로 역시 낯선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그래서 여행은 즐겁고 환희롭습니다.
순례는 더욱 이러한 성격이 강화되는 것 같습니다. 순례지의 유적 그 자체, 옛 선인들의 자취, 세월이 남긴 색채의 변이, 공기의 맛과 분위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풍기는 인상들이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상들이 내게 전하는 말들이라 봅니다.
여행은 친구와 같습니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모든 존재들이 새로운 친구가 되어 줍니다. 그 친구는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 나의 삶의 지평을 개척하고 넓혀 줍니다. 성지순례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친구들에는 부처님과 그 위대한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다시 밟고, 그분들이 숨 쉬던 공기를 다시 들이마십니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것에서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까지 농축시켜 다시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어루만져 봅니다.
--- p.13~14
여행이 내게 해 줄 이야기들에 생기生氣를 불어넣고, 쌓여 있는 벽돌들의 군집群集에 새로운 현장감을 부여하는 일,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과거 활동의 아련한 모습들에 그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듯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숨 쉬게 하고, 그리하여 매양 흐트러져 다시 다잡아야 하는 우리네 신심에 확신의 폭포수를 붓고, 깨침을 향해 가는 길에 끊임없는 돌진의 동력을 배가시키는 것, 이것이 이 책을 쓰는 데 가장 고려된 사항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는 바로 아잔타-엘로라 석굴과 산치 대탑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와 부조에 들어 있는 부처님 일대기와 본생담이었습니다. 벽화의 오래된 색채들과 돌 부조의 패이고 드러난 요철들은 2,500여 년 전 과거라는 시간의 범위를 벗어나고, 책 속에 갇힌 활자들의 틀을 깨고, 그러한 작품들을 남긴 화공과 장인들의 신심과 예술혼을 느끼게 하고, 멀리 그곳을 찾아간 우리 순례객들의 마음에 접목되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삶이 우리의 현대적 삶 안으로 비집고 들어옵니다.
--- p.14~15
이러한 내용들이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로부터 시작되어 나머지 성지순례에서 그 이야기들이 발생했던 현장을 방문하고 그것들이 남긴 유적들을 만남으로써 이번 순례가 주는 대화의 밀도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또한 5세기 초의 법현 스님, 7세기 중엽의 현장 스님, 7세기 후반의 의정 스님, 8세기 초의 혜초 스님의 여행기들을 충분히 인용함으로써 1,600여 년 전~1,300여 년 전의 모습을 기록한 스님들의 감흥을 공감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더욱이 카트만두에서 예기치 않게 부처님 살아 계실 때 멸망한 석가(샤카)족들과 만나게 된 것은 부처님 전생담과 일대기로 시작한 대화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깊은 의미를 스스로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이보다 더한 대미의 장식은 여행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 p.15
인도는 무엇보다 부처님께서 살다 가신 나라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불자들에게 인도는 로망이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 성지를 순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자 가장 경험하고 싶은 일이다. 아무리 책에서 읽고 다른 이들로부터 듣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직접 체험을 대신할 것인가?
4대 성지의 참배는 부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신 이래 유구한 불교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4세기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인 법현法顯 스님도 자신의 순례기인 《불국기佛國記》에서 “여래께서 열반하신 이후로도 4대탑이 있는 곳은 서로 전해져 끊이지 않는다. 4대탑이란 여래께서 탄생하신 곳, 득도하신 곳, 법륜을 굴리신 곳, 열반하신 곳이다”라고 쓰고 있다.
--- p.31~32
인도 석굴의 총 수는 1,200기 이상이며 약 75%가 불교 석굴이다. B.C.E. 1세기~C.E. 2세기에 개굴된 전기굴과 C.E. 5~8세기에 개굴된 후기굴로 크게 구분되고, 전기굴은 사타바하나 왕조와 연관이 깊고 대부분 불교 석굴이며, 후기굴은 굽타 왕조와 그 이후 시대로 불교 석굴 외에 힌두교 석굴이 많다. 자이나교 석굴은 소수이나 두 시기 모두 존재한다.
인도 대륙 가운데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데칸 고원의 서남단인 마하라슈트라주에 대부분 집중된 석굴군은 1,000여 개에 이른다. 비하르주, 동해안의 오리사주 및 안드라주에는 부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만큼 데칸의 석굴 사원은 불교 건축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잔타 석굴은 후기의 불교 석굴 중에서는 가장 먼저 개착되었으며 규모가 큰 석굴로서, 불교를 떠나서 인도의 고대 문화예술의 백미白眉이다.
--- p.56
오늘의 순례지 엘로라 석굴은 아우랑가바드의 북서 34km 지점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바위산 동쪽 사면 2km에 걸쳐 파여진 석굴 34개이다. 남쪽에서부터 번호를 차례로 붙여 올라오는데, 1굴에서 12굴까지는 불교 석굴로 6~8세기에 개굴되었다. 여기에 이어지는 13굴에서 29굴까지는 힌두교 석굴인데 6~8세기에 주로 개굴되었고, 늦은 것은 10세기까지도 조성되었다. 가장 북쪽의 다섯 개의 석굴(30굴~34굴)은 자이나교 석굴로 8세기 말~10세기에 만들어졌다. 엘로라 석굴은 10, 16, 29, 32굴 등이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10굴은 불교 석굴이고, 16, 29굴은 힌두교 석굴, 32굴은 자이나교 석굴이다. 불교 석굴은 1~5번 굴이 먼저 조성되었다고 보는 설이 일반적인데, 6번 굴이 최초라고 하기도 한다.
--- p.159
역사적으로 보면 힌두교는 많은 다른 사상들을 흡수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남근 숭배나 약샤, 약시 등 비非아리안적 기원을 가진 토착 신 앙들을 흡수한 것은 물론이고, 거대한 흡인력을 한껏 발휘, 불교의 위대 한 사상을 흡수하고 C.E. 5세기에 6파 철학을 등장시키면서, 정교하고도 고차원적인 이론 체계를 확립하고, 각종 힌두경전들을 확정했다. 이는 새로이 등장한 굽타 왕조의 제왕들에 의해 힌두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힌두교는 이러한 사상적 흡인에 그치지 않고 석가모니 불을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지명하면서 불교 교단 자체를 자신들 속으로 빨아들여 용해시켜 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때를 맞춰 편승한 이슬람의 군대가 불교 사원들을 파괴시켜 주니, 불교는 인도에서 멸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 p.179
보조적 부조를 주제별로 보면, 보리수와 탑?법륜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며, 천상계와 약샤는 불법의 수호와 보편성을, 동물은 불법의 위엄과 따르는 무리를, 여의덩굴도와 꽃문양은 생명력을, 약시목욕도는 풍요를 상징한다.
보리수, 탑, 법륜, 금강보좌 등 부처님의 상징 숫자를 세어보면 총 120점(상징도에만 66개에 61점의 내용도에 1점 당 1개 이상의 부처님 상징이 있으므로)이 넘는 많은 숫자이다. 이러한 숫자는 비록 부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무불상시대이지만 부처님에 대한 표현의 욕구가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산치 대탑의 미얀마적 형태라 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불탑인 미얀마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에도 산치 대탑의 동서남북 사방불의 위치에 감실형 전각을 마련하고 많은 불상을 모셨으며, 파고다를 둘러싼 회랑식 앞마당을 격하고 형성된 많은 전각에 수많은 불상들을 안치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불상 표현의 강력한 욕구의 역사적 발전 양상이라 할 것이다.
--- p.300
인도에서 짜이는 차 음료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래서 인도 호텔에서 짜이를 달라고 하면 홍차를 주거나 홍차에 우유를 타 준다. 마살라 향신료를 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유를 제대로 끓이지 않는 단순 밀크 티이다. 마살라 짜이를 마시고 싶으면 호텔 직원에게 마살라 짜이를 따로 주문해야 한다. 물론 무료이다. 인도의 길거리 짜이 가게에 가서 짜이를 달라고 하면 마살라 짜이를 준다. 마살라 짜이는 홍차와 우유, 인도식 향신료를 함께 넣고 끓인 음료이다. 그 인도 향신료를 마살라라고 한다. 마살라는 인도 요리에 사용되는 혼합 향신료를 일컫는 말로서 강황, 생강, 카라핀차, 코리앤더가 네 가지 기본 구성인데, 커리와 사실상 같은 의미를 가지는 듯하다. 인도의 서민들의 길거리 음식인 마살라 짜이가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우리에게 짜이라고 하면 마살라 짜이를 지칭한다.
--- p.325
갠지스강가에 있는 다샤슈와메드 가트에 도착, 머리를 길게 기르고 이마에 꽉 차도록 색색깔의 가로줄을 그려 넣은 사두들, 머리를 기른 바라문에게 축복 받고 있는 사람들, 머리카락을 정수리 쪽에 몇 가닥만 남기고 깎은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거지들 등…. 가트의 모습은 2년 전이나 다를 바 없다.
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대당서역기》는 “대부분 대자재천을 믿으며 고행을 하면서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어떤 신도들은 머리카락을 잘랐고, 어떤 신도들은 아주 길게 기르기도 하며, 벌거벗은 채 몸에 재를 바르고 힘겹게 수행하는 신도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혜초 스님도 바라나시에 도착했을 때 대천大天(시바)을 섬기는 이들이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른다고 적고 있다. 1,3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모습들이다.
--- p.364
보드가야B?hgay?(불타가야佛陀伽耶)는 가야 시에서 11km 떨어진 곳으로, 가야에 속하지만 부처님의 성도를 기려서 보드가야라고 한다. 고대에 보드가야는 우루빌바Uruvilv?Pali:Uruvel?로 알려졌고, 중세에 마하보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마하보디라는 이름은 7~9세기경의 명문銘文과 구법승의 기록에 등장한다. 2세기의 마명 보살은 마하보디의 금강좌를 ‘성도成道’라는 심오한 명상을 견뎌 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였다.
--- p.371
마가다국(B.C.E. 684~B.C.E. 321)의 수도였던 라즈기르Rajgir(=라자그리하R?ag?ha, 王舍城)는 현재 인구 약 42,000여 명(2011년)의 시골 마을이다. B.C.E.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자기가 발견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도시지만, 역사 기록은 불교 경전상의 B.C.E. 6~5세기에 걸쳐 빔비사라(재위 B.C.E. 543~B.C.E. 494)왕과 그 아들 아자타샤트루(재위 B.C.E. 494~B.C.E. 461)왕 정도이고, 그들이 각각 건설한 구성舊城(40km의 외성벽과 7km의 내성벽)과 신성新城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빔비사라왕이 쌓은 옛 성(구왕사성)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며, 용수用水 부족으로 아자타샤트루왕의 아들 우다야바드라왕(재위 B.C.E. 461~B.C.E. 444)이 수도를 파트나로 옮기면서 라즈기르는 쇠락해진 것으로 보인다.
--- p.409
바이샬리는 남쪽 파트나에서 갠지스강으로 흘러드는 간다키Gandak 강변에 위치해 있는데 현재의 바사르Basarh 지역과 콜화Kolhua 지역이다.* 부처님 당시에 밧지국의 수도로서 사람들로 붐비며 음식이 풍요롭고 매우 번영한 도시였다고 한다. 7,707가지의 놀이터와 그 수만큼의 연꽃 연못이 있었으며, 기녀 암라팔리가 미모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바이샬리는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Mah??a(니간타 나타풋다)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이샬리에 관해 《대당서역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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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라지고 나자, 페인트 염료로 사용되는 나무들이 가지를 모조리 잘린 채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검푸른 하늘 바탕에 실루엣을 드리우는 시간마저 보내고 나서 맞이한 칠흑漆黑 같은 히말라야의 밤 7시 30분경 포카라 그랜드 호텔의 밝은 불빛이 우리를 반겼다. 포카라Pokhara는 인구 약 52만여 명으로 추정(2020년)되며, 해발 827m의 휴양도시이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밤 10시 일행 중 몇몇 분들 과 함께 1인당 편도 100루피에 봉고 택시를 불러 포카라의 어느 카페에 들러 촛불을 켠 채 세계적 휴양처에서의 낭만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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