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불편러로 지칭된 이들은 오히려 프로불편러가 어때서, 라는 당당한 태도와 함께 그 말을 상대방으로부터 뺏어왔다. 우리의 불편함은 부당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당당하게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드러내겠다는 선언. 꼭 여성혐오의 문제만이 아니라 여전히 전근대적인 정치의식이 지배력을 발휘하고, 반지성적 선동이 소위 정치적 진보 진영 안에서도 등장하는 지금 이곳에서 프로불편러는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에 대한 자기긍정의 표현이 되었다.
--- p.4, 「나도 프로불편러일까」 중에서
일베의 헛소리 중 그래도 진보 진영에 대한 무시와 비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역사의 진보를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건 ‘찌질한 키보드 워리어’들이 아닌, 새 시대의 야만이다.
--- p.14, 「일베, 새 시대의 야만」 중에서
〈디스패치〉뿐 아니라 많은 매체들이 독자의 알 권리(right to know)를 이유로(사실 그 개념도 굉장히 왜곡해서 쓰지만) 자신들의 보도를 정당화하지만, 매체의 공익성에서 알 권리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건 독자의 알 필요성(need to know)이다. 독자에게 이 팩트를 알리는 게 정말로 필요한 일인가? 이 고민은 결국 철학의 문제다.
--- p.23, 「디스패치는 옳은가」 중에서
즉, 윤서인은 시장 논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기에 가능한 한국의 높은 의료 복지를 찬양하면서 시장 논리 역시 옹호하느라 바로 그 의료 복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성숙한 시민들을 의료 복지의 무임승차자로 왜곡하는 무리수를 감행한다. 논리적으로는 파탄에 가깝지만, 기본적으로 무임승차를 혐오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식의 공격은 생각보다 효과적이다. 알고 한다면 악의적이고, 모르고 한다면 무지하고 악의적인 것이다.
--- p.34, 「윤서인과 〈조선〉, 이토록 후안무치한 세상」 중에서
에두를 것 없이 〈뷰티풀 군바리〉는 비윤리적인 작품이다. 만화의 배경에 대해 2006년이라는 구체적 시간을 명시해 당시 실제 의경이 겪던 폭력으로 수아가 겪는 폭력을 정당화하되, 반대로 이건 가상의 대한민국이라며 폭력의 구체적 맥락이 없는 부실함을 눙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여성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되 비난은 피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그래서 다시, 이 만화는 ‘뷰티풀’하지 못하다. 성찰 없이 묘사한 대상은 얄팍하다. 제아무리 가슴을 크게 그린다 해도.
--- p.52, 「〈뷰티풀 군바리〉, 이토록 어글리한 만화」 중에서
개인의 권한과 책임이 조직 시스템 안에 명확히 정립된 회사라는 판 위에서 돌 하나로 판세를 뒤바꾸는 신묘한 수란 존재하기 어렵다. 대신 아직 온전하게 짓지 못한 집이나마 지켜내고 다음 수를 위해 인내할 뿐이다. 드라마 미생〉은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수의 의미를 더 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유예된 패배가 아니다. 내일이란, 오늘을 견뎌낸 자의 전리품이다.
--- p.58, 「〈미생〉, 삶의 가장 비루하고 아름다운 순간」 중에서
너는 어느 입장이냐는 질문에 대해 예스 혹은 노를 말하는 대신 왜 그런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느냐고 되묻는 것이다. 옳은 질문에서 항상 옳은 대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틀린 질문에선 절대 옳은 대답이 나올 수 없다.
--- p.75, 「이번 주에도 타일러는 살아남았습니다」 중에서
끊임없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존재에게 때로 과격함은 주체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 된다. 존중은 연민이 아닌 두려움으로부터 온다. 메갈리아의 반대자들이 그들을 ‘여자 일베’라 칭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또한 그에 대한 메갈리안들의 반박 논리이기도 한 ‘미러링’ 개념은 그래서 지금에 와선 오히려 논의를 공회전시킨다. 물론 단순한 남성혐오와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는 맥락이 다르며 폭력의 질 역시 다르다. 하지만 실천적 차원에서 어쨌든 이것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는 그 윤리적 빈틈을 파고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미러링’ 개념으로 방어하지만, 사실 현재 메갈리아의 분노에 찬 남성혐오는 남성들에게 사실 너희가 하던 게 이런 것이었다는 걸 비춰주는 정적인 거울이 아니다. 그보단 우리도 너희에게 아픔과 쪽팔림을 줄 수 있는 주체라는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선언에 가깝다.
--- p.85, 「메갈리안, 분노가 이긴다」 중에서
대체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인가. 옹달샘은 잘못했을지언정 잘못되진 않았다. 지금 옹달샘과 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장면 장면은 한국 사회에서 자주 보던 풍경들을 재현한다. 어떤 잘못을 해도 긴밀히 얽힌 카르텔이 있으면 대충 뭉갤 수 있다. 뭉개다 보면 조금씩 잊힌다. 잊히면 미디어의 조력을 받아 잘못 자체를 지우거나 희석해버린다. 이것은, 진실의 문제다. 망각과 권력의 합작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문제.
--- p.162, 「옹달샘은 과거를 어떻게 세탁하는가」 중에서
여전히 왜 한국 대중을 위한 팬 서비스는 애교를 당연시하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이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귀여운 걸 보고 싶은 감정과 귀여운 걸 제공하는 게 당연하다는 믿음은 같지도 비슷하지도 않다. 상식이 당연해지는 것만큼, 잘못된 관습이 당연해지지 않는 것도 진보다. 그러니 대단한 건 아닐지라도 당장 ‘샤샤샤’부터 좀 줄여나가는 건 어떨까.
--- p.196, 「‘샤샤샤’는 이제 그만」 중에서
다수 TV 저널리즘이 대중이 알고 싶어 하는 것(want to know)을 쫓는 상황에서, 그들은 고집스럽게 대중이 알 필요가 있는 것(need to know)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종종 잊히는 사실이지만, 언론의 등대는 대중의 관심이 쏠린 곳이 아닌, 대한민국의 가장 어두운 곳을 비춰야 한다. 세월호가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심연의 바다처럼. 어쩌면 이것은 외로움을 감수하기에 의로운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 p.207, 「JTBC 뉴스의 외롭고 의로운 싸움」 중에서
촉이 좋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문제를 맹아처럼 품고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눈에 보이게 솟아오른다. 어느 분야든 프로불편러의 피드백이 필요한 건 그래서다.
--- p.216, 「이영돈 PD가 간다 그런데 어디로?」 중에서
과거의 올림픽이 정해진 규칙 안에서의 기록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여성들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그동안 의문시되지 않았던 남성 중심적인 올림픽의 권위가 도전받는 순간들을 목격하고 있다. 그 순간을 담아내는 주류 미디어의 언어가 「남편의 사랑의 힘」 따위의 빈곤한 수준이라는 건 민망한 일이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힘차게’ 세상을 읽진 못할지언정, 눈앞의 변화도 따라가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올림픽에 가장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 p.238, 「올림픽 중계, 더 느리고 더 낮고 더 무기력하게」 중에서
잘못된 과거를 깔끔하게 바꾸는 통쾌함은 여기에 없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교차하는 시간은 해영의 시점에서 본 과거인 동시에 재한의 입장에서 본 미래이기도 하다. 재한의 아버지는 수현에게 미결된 사건도 그다음 세대가 해결할 거라던 재한의 말을 전한다. 재한이 현풍역 근처에서 주부를 구해낸 덕에 한 생명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는 상징적이다. 현재의 작은 희망은 과거의 누군가가 절망을 견디며 만들어낸 미래다. 과연 현재의 우리도 미래를 위한 작은 희망을 남길 수 있을까. 드라마 바깥의 신호들을, 작은 흐느낌을 놓치지 않으며.
--- p.268, 「응답하라, 시그널에」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별의 풍경은 똑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선 지평이 절대적인 기준이라 생각하며 저 모든 별을 객체로 보는 것과, 내가 선 지평이 유동적이고 움직이는 저 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별을 보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진정 성실한 비평이란 내가 움직이는 행성 위에서 관측하고 있다는 자각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세상은, 그렇게 넓어진다.
--- p.272, 「〈대니쉬 걸〉과 〈캐롤〉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중에서
몸에 좋고 입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경 써서 머리를 하고, 큰마음 먹고 예쁜 운동화를 사며 세상을 견뎌내는 것처럼, 마냥 좋고 귀여운 풍경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 대한 비판적 관심을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입고 좋은 걸 보며 나의 일상을 즐겁게 유지하는 것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이다.
--- p.309, 「기쁘다 〈요츠바랑!〉 오셨네」 중에서
하지만 칠봉이 정말 좋은 남자라면,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라며 자기연민에 징징대거나, 「늘 널 바라보는 그게 내가 가진 몫인 것만 같아」라고 자기만족에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한순간도 선의라는 이름으로 나정에게 부담을 준 적이 없다. 내기에서 이겨 야구 경기에 응원하러 와달라고 할 때도 ‘소원’이 아닌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한다. 비싸지만 촌스러운 화장품 세트를 산 쓰레기와 달리 샤넬 향수를 나정과 나정 어머니에게 선물해 점수를 딴 작은 에피소드에서 증명되는 건 서울 남자로서의 센스만은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얼마나 비싼 돈을 쓰고 얼마나 선의를 품었는지가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고려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의 차이이기도 하다.
--- p.317, 「칠봉이, 좋은 사람 좋은 남자」 중에서
일부러 팬클럽 컬러에 맞춘 옷을 입고 온 김연경이 「고마워요」 한마디만 해도 「꺄악」 비명소리가 나오고, 「윙크해주세요」, 「언니 사랑해요」 같은 외침이 들리며, 김연경이 터키로 떠난다는 사실에 눈물 흘리는 이 장면은 아마 그동안 실체 없이 소비되던 걸 크러시라는 개념이 예능, 아니 방송을 통틀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난 순간일 것이다. 여성에게 열광하는 여성, 그리고 그런 열광을 진심으로 즐길 줄 아는 여성. 많은 연예인이 여성과 여성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콘셉추얼한 차원으로만 국한시키기 위해 ‘걸 크러시’ 개념 뒤에 숨었다면, 김연경은 자신의 인기에 당혹해하지도 뭐라고 부연하거나 단서를 달지도 않는다. 하하, 여자들에게 인기 많다니 좋군.
--- p.342, 「김연경, 한국 예능에 대한 크러시!」 중에서
야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깟 공놀이’겠지만,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싹이 트는 걸 보는 것은 공놀이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변화는 가능하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 p.351, 「이 죽일 놈의 LG 트윈스」 중에서
엄청난 업적을 거두고 본인의 네 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고도 일종의 ‘콩라인’으로 분류되고 자주 희화화되는 그의 캐릭터는 메시의 메시아적인 느낌보다 더 인간적이고 흥미롭다. 결코 금욕적이지 않으면서도 그토록 강철 같은 육체를 유지하는 이 독특한 프로페셔널을 나는 항상 안쓰러운 마음으로 응원할 것 같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게 호날두 걱정이겠지만.
--- p.360, 「우리 호날두 까지 마요」 중에서
하지만 평범하다고 해서 혹은 그 이하라고 해서 패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는 거의 언제나 탁월한 이들의 것이겠지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그 무대는 탁월하지 않은 다수가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만들어가는 하루하루 위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이 충분히 고귀하다고 믿는다.
--- p.368, 「심수창에게서 인생을 배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