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란 한 사람이, 한 사회가, 인류가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자원이 될 만한 사상, 지식, 책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것에는 생존과 그 이상의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편 전쟁이 났는데 보낼 수 있는 자원이 자기 아들밖에 없는 사람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프롤레스(pr?es)’라고 불렀습니다. 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노동자 혹은 노동자계급이라 알고 있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말의 뿌리가 바로 ‘프롤레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서」는 고전입니다. 이 옛 문서는 인간은 누구인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할까,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신적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기적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폭력에 맞설 수 있는가, 새로운 질서를 꿈꿀 수 있는가, 이런 심오한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심도 있는 대답을 제시합니다.
--- 「제1강」 중에서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벗어난 요한이 외쳤습니다.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바로 이 외침, 일종의 슬로건을 예수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비유하자면 이어달리기에서 뒤에 오는 주자에게 바통을 건네주듯이, 이 슬로건과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세례자 요한이 들고 뛰다가 예수에게 건네줍니다.
요한의 저 외침은 오늘날 비종교인뿐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도 오해하는 구절입니다. 회개하라는 말부터가 그러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뭔가 기분 나쁘지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회개하라니 언짢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가 말한 ‘회개하라’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죄를 돌이키라는 뜻 이상입니다. ‘삶의 방식 자체를 돌이키라’는 의미이지요.
--- 「제3강」 중에서
인간의 존엄은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예수는 늘 오른뺨을 맞는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지 말라고 합니다. 당신도 존엄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채무자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돈이 없다고 자신의 삶을 함부로 유린하도록 놓아두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가난한 삶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과 권력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대하고, 그 삶에 짐 지우는 이들에게 경고하지만 동시에 법과 권력의 힘에 짓눌려 슬기와 용기와 위엄을 접어두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법과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편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늘 당해온 사람들은 자기는 마땅히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당신은 철학자 통치자라고.
--- 「제4강」 중에서
오늘날 사회는 능력주의를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받는다, 그래서 능력이 모자란 사람과 뛰어난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이런 것이지요. 열심히 일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이 버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그래야 일할 맛도 나겠지요. 난 열심히 일하고 저 사람은 노는데 똑같이 보상을 받으면 정말 화가 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편으로 한 사회가, 또 전체 세계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성장은 불가능하고, 한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양이 급격하게 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한 사회의 잠재적 총량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얼마큼 받아야 하는가. 능력이 없어 사회에서 고용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가. 또 다른 한편 능력주의 앞에서 묻습니다. 당신의 그 능력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 능력을 발휘할 이 사회는 누구의 ‘능력’으로부터 존재하는가.
--- 「제6강」 중에서
“심판자 노릇을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심판하는 그대로 여러분은 심판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재단하는 그대로 여러분도 재단당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흔히 알려진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심판’이 아닌 ‘비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가 어떤 비판적 행위를 다 금지한 것처럼 들리는데, 예수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예수 자신부터 고쳐야 할 겁니다. 예수는 비판을 엄청 많이 했으니까요. 일례로 「마태복음서」 23장을 저는 ‘욕 ( 辱 ) 장’이라고 부르는데 그럴 정도로 예수가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어마어마하게 욕을 합니다. 여기서는 비판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종교의 핵심에는 비판 정신이 있습니다. 예수가 말한 뜻은 심판자 노릇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남의 삶의 전모를 파악한 듯 그와 그의 삶과 인격에 대해서 최종 판결권을 가진 듯이 굴지 말라는 것이지요.
--- 「제7강」 중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금의 질서가 우리의 삶과 사회에 전혀 유익하지 않다면 거대하게 도발적 상상을 하고 새로운 질서를 꿈꾸어라. 정교하게 상상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과감하게 실행할 능력과 용기를 또한 기획하라. 오늘날의 우리 역시 자조적이고 패배주의에 싸여 쉽게 자문합니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는 것 아니야?” 이런 허무의 몸짓을 향해 예수는 권유합니다. 이 짧은 생애가 전부라고 여기지 말라고 말입니다.
--- 「제8강」 중에서
마태 공동체는 그 상황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지배 체제의 정당성에 동조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태 공동체는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에게서, 그리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믿음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봤습니다. 그 믿음이 만들어놓은 상징 세계 속에서 현실을 살아갈 때 결코 주눅 들거나 움츠리지 않았고, 위엄과 품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소박한 삶을 살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갈 통치자로서의 삶을 구가하려 했던 사람들이 마태 공동체입니다.
--- 「제10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