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0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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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68쪽 | 570g | 140*210*21mm |
ISBN13 | 9791160947045 |
ISBN10 | 116094704X |
발행일 | 2021년 0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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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68쪽 | 570g | 140*210*21mm |
ISBN13 | 9791160947045 |
ISBN10 | 116094704X |
MD 한마디
김초엽 소설가와 김원영 변호사는 공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손상된 신체를 보완하는 기계(보청기와 휠체어)와 만났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사이보그가 그려갈 미래를 논한다. 사이보그의 존재론과 윤리에 관한 두 사람의 통찰이 빛난다. - 손민규 사회정치 MD
추천의 글 들어가며 _ 김원영 1부 우리는 사이보그인가 1장 사이보그가 되다 _ 김초엽 다이아몬드 행성의 사이보그 남자 | 낯설고도 익숙한 장애인 사이보그 | 향상하는 대신 전환하는 기술 2장 우주에서 휠체어의 지위 _ 김원영 반려종 휠체어 | 거울 앞에 선 장애인 사이보그 | 의족과 휠체어는 몸의 일부일까 | 휠체어가 되어서 3장 장애와 기술, 약속과 현실 사이 _ 김초엽 장애를 극복하는 따뜻한 기술? | “우리는 장애를 종식시킬 겁니다” | 기술은 장애의 종말을 가져올까 4장 청테이프형 사이보그 _ 김원영 화성에서 살아남은 휴먼 | 인간을 넘어선 인간 | 호킹만큼 인간적이지 않다면 |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문제 삼는 존재 | 청테이프 같은 존재들 2부 돌봄과 수선의 상상력 5장 불화하는 사이보그 _ 김초엽 보이지 않는 장애 | 사이보그라는 낙인 | 사이보그는 로봇 외골격의 꿈을 꾸는가 | 사이보그 신체 유지하기 | 단일한 사이보그는 없다 6장 장애-사이보그 디자인 _ 김원영 뼈 공학의 한계 | 향유고래의 뼈와 안 보이는 보청기 | 패션과 디스크레션 | 테크놀로지, 장애, 페티시즘 | 불쾌함의 골짜기를 피해서 | 장애를 디자인하기 7장 세계를 재설계하는 사이보그 _ 김초엽 불구의 기술과학을 선언하다 | 지식 생산자로서의 장애인 | 보편적 설계, 장애 중심적 설계 | 빨대 퇴출은 비장애중심주의일까 | 유튜브와 해시태그, 장애권리운동의 새로운 물결 | 가상공간의 접근성 | 남아 있는 질문들 8장 슈퍼휴먼의 틈새들 _ 김원영 장애를 고치는 약 | 치료를 받아서 캡틴 아메리카 되기? | 매끄러움의 유혹 | 심리스한 디자인과 이음새 노동 | 매끄러운 세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 | 덜컹거림을 감수하는 힘 3부 연립과 환대의 미래론 9장 장애의 미래를 상상하기 _ 김초엽 우리의 다른 인지 세계 | 당신의 우주선을 설계해보세요 | 화성의 인류학자들 | 사이보그 중립 10장 잇닿아 존재하는 사이보그 _ 김원영 두 발로 선다면 의존하지 않아도 될까 | 나를 돌보는 로봇, 내가 돌보는 로봇 | 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삶 | 연립의 존재론 - 함께 있음을 돕는 기술 대담 _ 김초엽, 김원영 파트너가 되다 | 생존 이상의 이야기 | 장애와 과학기술의 복잡한 관계를 바라보기 | 몸 혹은 존재를 드러낼 계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 장애 경험의 고유성 | 사이보그라는 상징에 관하여 | 인간과 기술문명의 불가분의 관계 | 우리의 삶이 교차한 순간 나오며 _ 김초엽 감사의 말 참고문헌 |
※ ○으로 대체된 키워드들은 개인 정보로 검열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크게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장애학과 기술 사이의 유기성을 다룬다. 그럼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당사자성’이다.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규정짓고 활동하는 공동 저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책 앞날개에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와 '휠체어를 탄다.' 를 소개 글 가장 마지막에 써넣으며 본인의 입지를 밝히고, 장을 번갈아 가며 관련 담론을 펼친다.
그렇다면 동양인/여성/시스젠더/○○섹슈얼/비장애인 신체/중산층인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비록 로즈마리 갈런드-톰슨이 '정상인'이라 부르는 규범으로부터는 조금 어긋나있을진 몰라도 나는 내가 속한 이 땅에선 아주 보통의 인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비록 소수자성을 향한 타자의 혐오를 느껴본 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는 PTSD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존재라고 확신한다. 또한 어떤 순간적 '힘듦'으로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행하려 노력한다.
찬찬히 짚어보면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 그리고 나 사이에는 앞서 말한 '정상인' 템플릿에서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차이만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더 큰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처음 알았다. 활자로 썼을 땐 사소할지 모를 이 정체성의 간극이 근본적인 대역을 태초부터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느끼는 소수자성은 두 다리로 걷지 못하거나 남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종류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보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 증명의 연속이다. "여자라고 임금을 적게 받아서는 안 된다.",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도 동반자 법 아래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비수도권 자들에 대한 처우가 수도권과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등. 이런 단순한 입장들은 어떻게 보면 '장애인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차원보다는 훨씬 쉽고 편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보조를 요청하지 않아도 어쨌거나 '남들'만큼의 제 기능은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외침이다.
그러니 전복될 가치관조차 없어 얼떨떨했다는 감상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고개를 수도 없이 끄덕였으나, 이입한 횟수는 그와 비례하지 않았다. 감히 공감해도 되는지조차 어렴풋했다.
분명 성 소수성을 주제로 꺼낼 때도 비슷할 테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때마다 에이즈와 예수님을 들먹이며 나타나는 반反동성애 연대협회는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지리멸렬하고도 지긋지긋하게 주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의 주인공 자레드는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지만, 그가 주체적으로 결론 내린 본인의 정체성은 교회 사회 안에서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져 전환 치료를 받게 된다. 제목 그대로 주변인들로부터 본연의 존재가 지워지는 경험은 불쾌하고 비자주적이다. 그런데 장애는? 우리는 장애에 대해 생애 얼마 동안 생각하고 걱정하고 분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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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각 대한민국 서울은 전쟁통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지난 2021년 12월부터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를 지속하고 있으나,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장연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권리 확보 선전을 불법행위로 간주하는 등 '시민 불편과 불안을 초래하는 시위를 계속한다면 더 이상 관용은 없다'고 발표했다한국일보, “못 만날 이유 없다”던 오세훈, 전장연과 단독 면담 불발” 2023.01.19. 혹자는 이를 두고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시민은 어엿한 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단 입장만 굳혔을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처음 시위가 벌어졌을 때, 평소 버스나 자전거로 통근하던 나는 회사 동료들의 불평으로 아침을 맞았다.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지연돼서 지각했다느니, 왜 하필 출근 시간대에 시위하냐느니 따위의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얘기들은 듣지 않아도 됐다. 귀결되는 논점은 단 하나. "괜한 불똥에 멀쩡한 본인들이 피해를 보았단 것".
사실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거나, 크립 테크노 사이언스라거나, STS 같은 학문은 이 책에 소개된 것을 넘어 더 깊이 알아볼 시도를 하거나 연구로 이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기엔 아주 의아하다. 내가 이전에 썼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독후감에서 예술의 존재 가치에 관해 의심한 적 있듯, 그것들을 알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연이은 투쟁과 끊이지 않는 논란에 기사 전문 대신 헤드라인만 읽고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중, 문득 한창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던 시절, 영어권 국가 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그곳에선 휠체어를 탄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볼 수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저상버스가 아닌 차량이 오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는 타지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김원영 작가는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와 같은 의문을 던진다. 흔히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하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 권리인 이동권은 투쟁해야만 겨우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곧잘 감동 받곤 하는 마케팅에서도 이런 시선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인간적인 신기술'의 뛰어난 업적으로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농인, 가족의 목소리를 듣게 된 청각장애인, 로봇 다리를 장착하고 다시 뛸 수 있게 된 지체장애인의 모습을 조명하고 비장애인은 눈물을 훔치는 광경은 앞서 언급한 성소수성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교정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곧 도래할 최신 과학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란 믿음은 기후 위기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다룬 맥락과 유사하다. 엄청난 속도의 기술 발전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당장 눈앞의 현실을 가린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교화 대상으로 여기는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자면 학창 시절에 공모했던 '전국 학생 설계 경진대회'가 있다. 대한기계학회가 주최하고, 여타 정부기관과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꽤 큰 행사였다. 대주제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따뜻한 기술의 개발'로,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사회 여러 계층에게 과학기술의 힘이 미치도록 기획되었다. 그맘때쯤 공대로 입시의 방향을 정했기때문에 단순히 외부 활동 스펙이 필요해 참여했던 대회였다. 운좋게 입상까지 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광역시권 출생/명문 학군/전문직종 자제인 나와 친구가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단순히 미디어와 고정 관념이 그리는 이미지들을 캐치하고 '따뜻한' 기술이란 이름 아래 설계한 ○○ ○○○의 도면은 스케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고, 설계 취지와 내용도 부실했다. 기억에 본인이나 주변인의 장애 때문에 현실에서 부딪힌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설계를 한 팀은 전무했다(이점은 특히 대학부보다 고등부에 특출나게 드러났다). 대체 누구를 위한 대회였을까?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는 걸,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무능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또 있다. 나의 조부모님은 얼마 전에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그곳에는 조명과 난방을 포함한 모든 기본 설비들을 하나의 터치패드로 중앙 제어할 수 있다. 스위치가 없고 매끄러운 공간은 '심리스seamless'하고 유연한 현대적 공간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나이가 들어 시력이 감퇴했거나 새로운 걸 배우고 익히는데 서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절대 아니다. 어머니가 집들이 선물로 드린 가습기는 전원 버튼이 감춰져 있고, 리모컨이나 LED로만 상태를 조작하고 확인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선 호수와 비밀번호를 차례로 가볍게 입력해야 한다. 가장 편안하다고 느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의 진입마저 어떤 난관이나 관문처럼 느껴지니 지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할머니는 이사 후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계시는데, 혼자서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는 과정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물론 고택에서는 벨을 누르면 수화기를 들어 문 열림 버튼을 눌러야 했고, 방을 데우기 위해선 장작불을 피워야하는 불편함이 존재했지만, 사용자의 의식적 개입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 이음새는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경험이다.
그러니 10여 년 전에 그 손녀가 공모하고 설계했던 ○○ ○○○는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에도 하나도 필요치 않다.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2주기인 지금, 장애인의 이동권은 여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나아진 게 정말 하나도 없다. 궁극적으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이 희미해지기 위해선 관계를 장애/비장애의 구분에 묶지 않아야 한단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리처드 사이토윅이 <공감각>이라는 책에서 쓰고, 이 책의 9장에서 인용한 아래 문장으로 독후감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우리는 움벨트 안에서 나오려고 투쟁해야 한다. 움벨트는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데미안을 각색한 문장과 함께.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해당 독후감을 통해 전장연 활동에 관심이 생기신 분은 하기 정보로 일시/정기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
어쩌면 자격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나 싶다. 소수성을 띠는 문제에선 어쩔 수 없는 걸까?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바를 '장애 당사자에게 장애주의적 의견을 물어보자'고 정리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보여지는 것을 꼭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먼 미래의 완전한 치료보다 현재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살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 다르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직면하고 부딪치고 싸워야 할 것이다.
8장 <슈퍼휴먼의 틈새들> 정말 좋았다. '이음새'라는 단어를 통해서 기술 발전의 방향성을 설명하고 기술이 (비장애인 시점에서) 완성됐을 때 그 이후의 발전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장애인일 것이라는 이야기의 흐름이 완벽하게 좋다. 김원영 작가님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기술은 이음새가 뜨는 걸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특히 장애는 심리스를 만들기 위해 드는 노력이 특히 더 필요하다. 이후 완전히 매끄러운 세계에서 이음새를 띄우는 사람이 필요할 때 그 존재는 취약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
김초엽 작가님 글 중 가장 좋았던 문장. 진짜 사람으로 상처받고 사람으로 치유하고.. 인생 그렇다!(ㅠ) 대부분의 타인들과 안맞는 게 당연한 이 세상에서, 그럼에도 높은 확률로 행복을 안겨주는 이 사람들을 더욱 사랑해야지. 그리고 더 크고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어야지.
타인이란 애초에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 편견과 다른 생각, 동의하기 어려운 이념의 운반체다. (...)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편안한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을 향할 때, 열려 있는 상호 작용의 장으로 나아갈 때,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만이 가능한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의 만남들이 있다.
이하 형광펜 쫙쫙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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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평등/공평 담론에서는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제일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어떤 차이점들로 균열이 발생하는지 알아야 해결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끊임없이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사고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다.
청능주의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모든 장애인들이 비장애인의 소통방식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언젠가 자폐증의 원인을 밝혀내겠다는 목표 아래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자폐인과 가족들이 지금 당장 좀 더 행복하고 건강하고 생산적이며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까? 후자가 잘 된다면 전자를 원할 사람들은 현저히 적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장애가 부정적인 낙인의 총체로 작용하는 사회에서는 '적절한 환경과 조건에서 장애인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선택지는 사라지고, 장애는 완전한 무능 혹은 그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의심의 대상으로 이원화된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검증하며 쓸데없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대신 배려하는 마음을 갖지는 못하는 걸까?
낙인과 '정상성'으로의 패싱에 대한 갈망,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장애를 가진 개인은 끝없는 긴장 속에 놓인다.
재벌(..)처럼 과시하고 싶은 소수성이 아니라면 어떤 측면에선 다들 공감할 듯
청각장애 아이에게 이식에 대한 선택권을 주지 않고 음성 언어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것이 옳은지, 수어를 통한 언어 발달과 음성 언어를 통한 다소 불완전한 언어 발달 중 어느 것이 아이들을 위한 선택인지 분명한 답은 없다.
선택지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직접 선택하게 한 다음, 존중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지만..
과학철학과 과학기술학에 관심 있는 학부생, 대학원생, 교직원들을 모아 발제와 토론을 진행하는 스터디 그룹이었다.
초엽님 너무 비범해요
인공 와우는 '회복의 기술'이지만 결코 완전한 기술은 아니며, 절대적인 답이 될 수도 없다.
수많은 부작용들이 있다는 것,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어요...
기술이 장애인을 억압한다거나 혹은 장애인에게 혜택만을 가져온다는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니라, 기술과 장애의 관계를 장애 중심적으로 재해석하고 다시 쓰는 새로운 관점이다.
소수성을 띠는 당사자의 관점이 반영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고려했을 때 쿼터제는 정말 필요하지 않나..
메리의 집은 메리의 시각 손상을 장애화하지 않는 것이다.
장애'화'되는 것이 맞았다. 각자의 집과 공공장소에서부터 장애화를 경험하지 않도록 지원해주는 것은 어떨까?
본인조차도 어떤 배려가 필요한 지 알아서 척척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띵한 사례.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오랜 기간 고민해야 하는 이유.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결국 보편적인 이용자들에게도 널리 쓰인다면 물론 좋은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설계라는 개념의 함정도 지적된다. 다시 말해서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 햄라이의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양극단의 명시적인 목표를 가진 결과물을 더 좋아한다.
한국의 등록 장애인 2018년 기준 25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퍼센트를 차지한다.
20명 중에 한 명꼴. 고등학교 이후로 학교/회사에서 본 기억이 없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을 기회를 자꾸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이 각자 너무나 고유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잊는다. (...)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삼을 상상하는 일에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것이 무의미한 걸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삶을 애써 상상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
인류가 그보다 현명하다면, 다른 존재로서 서로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들고 또 서로 적응해가며 같이 살아가는 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처럼 로봇에게 맡겨도 괜찮을까?
문제는 돌봄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노인들의 사회적 접촉 기회를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이에 상관 없이 인간에게 일과 사회 경험이 너무 중요해서 로봇은 최소한의 역할만 했으면 좋겠음...
중증 장애인이 로봇의 지원을 받아 고양이를 돌보고, 그 고양이는 비장애인 가족을 정서적으로 도우며, 비장애인 가족은 중증 장애인을 지원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 돌봄의 순환 속에서는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을 포함해 누구도 일방적으로 돌봄을 제공하거나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누가 지치지 않도록 돌봄의 순환을 만들자.
우리는 다른 문화와 도시에 속해 있지만, 나와 연결된 어떤 경험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 시대인걸 감사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려구요...
부지런하게 세계를 고치고, 메꾸고, 덧대고 수선하는 그 상상력으로부터.
함께 세계를 고치고, 메꾸고, 덧대고 수선하고자 합니다. 조금.. 빡칠 때도 있겠지만..
삶은 불행하거나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불행한 동시에 행복하고 슬프고 또 아름답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때로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조금은 기쁘게 받아들인다.
기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서점님의 유튜브를 보다가,
이 책에 대해
각 집에 한 권씩 보유해두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이었나
아무튼 그렇게 소개되었던 책으로 기억을 해요.
영업왕 겨울서점님이 그만큼 추천해주시는 책이라면 읽어보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냉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Q. 예상했던 내용과 실제 내용의 차이?
A.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제목이 과연 뭘까 궁금했는데, 장애인과 몸, 기술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스스로 장애에 대해 생각해본 적 많고, 편견에 대해서도 많이 재고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새롭게 마음에 다가온 내용들이 정말 많았던 책이었습니다.
Q. 책을 읽으며 생각했던 것?
A. 네모난 바퀴 자전거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네모난 바퀴 자전거가 계속 생각났어요. 네모난 바퀴를 가진 자전거가 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예전에 한 강연에서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보통은 그 자전거에 초점을 맞추어서 바퀴를 구부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자전거 바퀴에 맞춰 길을 다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요. 이 책에서 장애와 장애인을 보는 관점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장애에 대해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었어요. 우리는 장애에 대해 ‘치료’를 해야할 대상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닐지, 장애가 장애되지 않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않을지에 대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일부 개인이 되는 사회가 아닌, 모두가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전거 바퀴에 집중하기 보다는 바퀴가 다닐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에 시각을 돌려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지요.
소위 ‘따뜻한’ 기술로 인해 청각 장애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고 사람을 걷게 할수도 있게 되고. 하지만 과연 그 따뜻한 기술이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술이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 책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던 생각을 뒤흔든 예술적인 책이라 할 수 있겠어요.
다만 이 책의 저자가 청각장애를 가진 김초엽 작가, 지체장애를 가진 김원영 작가라서 그런지 장애에 관한 이야기도 신체적 장애, 그리고 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사이보그와 장애라는 주제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요. 언젠가 장애 전반에 관해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그런 내용도 두 작가님이 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Q. 이 책의 미래 독자에게
A.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생각, 기술 발전의 방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기술에 대해 고민을 할 때 어떤 것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책이었어요. 이시대를 살고있는 누구라도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겨울서점님의 추천은 다 이유가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