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힘은 어린 은홍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억셌다. 아무리 힘을 주어 도망치려고 해도 아버지의 손이 악귀처럼 그녀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노름판에서 빚을 진 아버지는 그녀를 기방에 팔아 돈을 마련하려고 했다. 내일까지 돈을 못 갚으면 아버지의 손이 잘린다고 했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지만, 기방에 팔리는 건 그녀에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 p.7
아버지에게 맞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은홍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붉은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그 치마의 주인이 이 기방 행수인 듯했다. 그 옆에는 사내의 발도 보였다. 비단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기방의 손님인 듯했다. 어떻게든 얼굴을 보고 도와달라 사정하고 싶었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누구든, 제발 날 좀 살려주시오. 이곳은 싫소.’
절박한 애원은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 p.8~9
“오백 냥.”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짚신 값을 말하는 거라면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 돈이면 짚신이 아니라 이 집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그대를 사기 위해 그대 아비에게 준 돈이다.”
--- p.10
“내가 그 아이를 사겠네.”
아이는 손재주가 있었고, 그래서 차라리 기방 기생이 되는 것보다는 상단에서 일을 맡기는 게 더 나을 듯해 나선 것이었다.
처음 의도는 그러했다.
팔리게 되는 아이도, 돈을 내는 그도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어차피 아비라는 자도 돈만 받으면 되었기에, 그의 앞에 넙죽 엎드리며 고맙다는 씨도 안 먹힐 인사를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p.12
그는 전혀 혼인할 생각이 없었다. 혼인하라 강요하는 가족도 없었다. 상단의 후계자야 그처럼 나중에 실력 좋은 이를 골라 수양아들로 들이면 되는 것이었기에 혼인에 대한 의무감도 없었다.
“오백 냥짜리 신부가 되게 잘 키워보시오.”
그렇게 말하며 웃는 곽 행수가 진심으로 원망스러웠으나, 이미 오백 냥은 그의 손을 떠났고, 그에게 남은 건 이 상황도 모르고 기절한 아이뿐이었다.
누가 장사꾼 아니라고 할까 봐, 혼인을 이따위로 하게 된 것이다.
--- p.13~14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미련하게 퍼붓는 빗속에서도 짚신을 팔던 그 아이에게 사람도 없는데 뭐 하는 거냐 나무랐더니 그리 말했었다.
기다렸더니 그가 왔다고.
취향관에서 맞아 기절할 때까지 도와달라 사정하던 그 아이가 그에게 그날과 똑같이 말하는 듯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걸 알기에, 그도 모른 척할 수 없었는지도.
--- p.16~17
“상단 안주인은 상단의 얼굴이다. 그런데 너처럼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누가 우리 상단에서 물건을 사겠느냐.”
은홍은 귀가 열려 있었지만 도대체 태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단 안주인? 누가? 내가?
--- p.18~19
“어찌 부르고 싶으냐?”
그의 낮고 그윽한 목소리는 그녀의 심장을 긁었다. 은홍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말했었다. 그녀가 그의 신부라고.
그럼…… 서방님?
--- p.21
청국 연경에 있는 동안 가져간 인삼을 다 팔고, 조선에서 팔 청의 물건들을 사들이느라 조선에서 장사할 때보다 더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그사이 집에 남겨두고 온 오백 냥 부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뚝―.
행랑 마당을 지나 중문간을 지날 때쯤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안채 쪽에 하얗게 피어난 목련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상단에서는 금방 시드는 꽃을 팔지 않았기에 그는 살면서 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 p.23~24
“내 말을 잘 들은 거 같구나.”
아마 살이 쪘다는 말일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젠 제법 살집이 잡힐 정도였다. 돼지였다면 잡아먹기 딱 좋은 상태일 거다.
“그럼 다음으로 네가 할 일을 알려주마.”
은홍은 태웅이 또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긴장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영리해져야 한다.”
--- p.26
덥석!
은홍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태웅의 팔 안으로 떨어졌다.
은홍은 태웅의 품 안에서 방금 날아가버린 새처럼 하얗고 까만 두 눈만 끔벅였다.
두근두근.
놀란 심장이 미친년처럼 널을 뛰었다.
--- p.32
만약 그녀에게 정말 그의 부인이 될 자격이 있다면 어서 빨리 그에게 어울리는 여인으로 자라고 싶었다. 밥도 많이 먹고, 책도 많이 읽고, 얼굴도 예뻐져서…….
드륵―.
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사랑채의 문이 먼저 열렸다. 그녀는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 p.43
처음이었다. 은홍이 그를 그리 부른 건.
그가 누군가의 지아비라는 게, 그녀가 그의 부인이라는 게 그 부름 하나로 선명해져버렸다. 어쩌면 그가 어렵게 고민한 것보다 더 간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부부가 된다는 건.
--- p.187~188
태웅은 끝까지 노리개를 은홍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 이걸 그녀에게 주면 진짜 그녀가 이곳을 떠나버릴까 봐 두려웠다. 양 대인은 그가 그녀를 화룡관에서 쫓아낼 수 있다 하였지만, 정반대였다. 그녀는 떠나고 싶을 때 이곳에서 떠날 의지가 있다는 걸 지금 보여주었다.
그는 그게 무서워졌다.
--- p.190
은홍을 데려가겠다는 양 대인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상단에 안주인이 필요해서 그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이젠 그가 더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걸.
그녀가 없는 화룡 상단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중했다.
그녀에게 억만이 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는 그녀의 지아비가 더 되고 싶은가 보다.
빗장이 풀린 마음은 몸보다 더 빨리 앞으로 내달았다.
--- p.199
태웅은 눈앞에 있는 그녀의 뽀얀 얼굴에 잠시 시선이 빼앗겼다.
어떻게 피부가 이리 하얗다 못해 투명할까 싶었다. 그래서 복숭아 익듯이 도홍빛으로 물든 뺨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향낭의 향인 줄 알았더니, 네 향이었구나.”
그의 말에 그녀는 꽃이 되었다. 꽃의 떨림은 온몸으로 퍼져 색이 더 짙어졌다.
--- p.217
“저는 대행수님 얼굴 중 입술이 제일 좋습니다.”
뭐?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태웅은 혼란과 본능이 뒤섞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몸이 반응하니 그는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은홍은 폭탄만 던져놓고 술기운이 온몸으로 퍼지자 그의 품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사람 마음에 불만 지펴놓고 태평하게 잠이나 자다니!
이래서 술이 나쁘다는 거다. 책임감이 전혀 없다.
--- p.292
꿀꺽. 순식간에 긴장감이 치솟았다.
점점 색이 빨갛게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태웅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도 당연히 알았다. 그녀가 의도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
기대하는 건 아직 그 혼자였다. 그에게 맞추자니 그녀가 버거워하고, 그녀에게 맞추자니 그가 애탔다. 그러니 그녀를 이끌고 지켜주어야 하는 그가 참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이젠 자신이 없었다. 그도 사람이고, 사내였으니까. 결국 한계는 올 거다. 이미 왔을지도.
--- p.308~309
누군가에게 안겨보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그 여린 다정함에 마음이 울컥했다.
“대행수님이 너무 커서 제 팔이 모자랍니다.”
그녀의 말에 태웅의 가슴이 떨렸다.
“아니, 내겐 넘친다.”
태웅은 그녀의 품 안에서 두 눈을 감았다. 이 평온함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 p.356
“큰일이구나.”
“네? 뭐가?”
‘밤 야(夜)’자를 뛰어넘는 뭐가 더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네가 너무 좋으니.”
그의 말은 별이 되어 그녀의 마음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 p.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