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에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백신이 개발되어 냉장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심지어 2020년에 유행하는 바이러스와 거의 일치하는 백신이라 100% 방어가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백신의 사용을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요?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살처분하진 않지만 동물들은 경제성을 이유로 살처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생명 경시에 대한 경고와 자각을 일깨우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우린 지금까지 막연한 걱정에 사로잡혀 살처분이라는 카드만을 고집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살처분이 언제 어떻게 시작돼 방역의 표준이 됐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 p.14, 「서문」 중에서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코로나가 치명률이 낮음에도 전염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발병 지역의 사람을 모두 죽여 전염을 차단한다고 하면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질병이 아무리 치명적이라도 인간에게는 이런 잣대를 들이댄 적이 없다. 하지만 가축에게는 이런 기준이 버젓이 적용된다. 심지어 구제역의 백신은 오래전에 개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서 백신보다는 살처분이 우선인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 p.30, 「와치트리, 세계 최대 살처분 매립지」 중에서
“네덜란드 백신정책의 시작은 링-백시네이션을 실시한 후 살처분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포위 접종’이라 불리는 방법으로, 발병 농가를 중심으로 수 ㎞의 방역대를 형성해 바깥에서부터 백신을 접종해 병의 확산을 조기에 막은 후 그 방역대 안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디바DIVA, Differentiating Infected from Vaccinated Animals 백신 개발을 계기로, 방향을 치료 위주로 전환했습니다. 백신 정책이 잘 수행된다면 더 이상의 살처분은 없을 겁니다.”
--- p.51, 「‘구제역=살처분’ 백신 논쟁의 발화점」 중에서
당시 전국 각지의 우시장 등이 폐쇄되면서 육류 파동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이때 센세이션한 동영상이 동물사랑실천협회CARE를 통해 공개된다. 바로 살아 있는 돼지를 구덩이에 묻는 잔혹한 살처분 장면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것이다. 유튜브에서 ‘이천 돼지살처분’을 검색하면 동물인권단체 ‘케어’가 올린 영상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M9WJypj4fg&t=2s)
--- p.68, 「‘살처분 원조’ 영국의 이율배반적 혈통 종 사랑」 중에서
“홍콩의 백신 정책은 2002년부터 시작됐습니다. 2003년 12월부터 홍콩에 오는 모든 조류에 백신을 접종했고 AI는 오늘날까지(2018년 기준) 2008년 오직 한 농장에서 발발한 사례밖에 없습니다. 그 AI 발발 사례는 항원 장벽이 있는 바이러스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예방 목적의 백신 사용이 효과가 있었다는 좋은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p.93, 「구제역 살처분 프리 선언, 백신」 중에서
“저희 동물복지 농가들은 수의사 선생님들에게 1년에 한 번씩 교육을 받습니다. 지난번 교육 때는 그분께서 힘들지만 열심히 하라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그분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살처분하라고 하더군요.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교육장에서는 열심히 하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살처분하라는 것은 저희보고 죽으라는 거잖아요. 이럴 거면 교육이 왜 필요한 거죠?”
--- p.111, 「우리는 가축의 질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중에서
WHO 자료를 보면, 2018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매년 120만 명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결핵은 150만 명, 말라리아는 40만 5,000명으로 추산된다. 아시아에서 광견병으로 개에 물려 죽는 사람만 해도 매년 5만 명이다. 2003년 이후 15년간 1,500여 명이라면 1년에 전 세계에서 100여 명이 사망한 셈이고 실제로 사람의 발병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이집트, 베트남, 중국 등 몇 개의 국가에 국한된다. 이 발병 국가들 중 대부분은 양계 농장에서 조류인플루엔자의 대규모 발병이 있을 무렵 사람에게 전파된 경우와 산발적인 농장 주변의 면역력 약한 사람에게 전파된 경우에 속한다. 인체 감염이 있었던 나라는 몇 개국에 지나지 않은 이 바이러스를 왜 그리 두려워했던 걸까?
--- p.119, 「여전한 미지의 영역, 조류인플루엔자」 중에서
국제수역사무국OIE이 정의한 조류인플루엔자의 고병원성highly path?ogenic이란, 단지 닭에서 바이러스가 얼마나 빠르게 증식하고 치명적인지를 기준으로 만든 이름이다. 즉, 오리나 기러기 같은 다른 조류는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려도 아무런 증상이 없고 다만 바이러스를 배출하고 보균만 할 수 있다.
--- p.121, 「여전한 미지의 영역, 조류인플루엔자」 중에서
살처분과 백신은 함께 사용해야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즉, 바이러스를 빠르게 제거하는 살처분의 장점과 바이러스 확산을 늦추는 백신의 장점을 살려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 p.131, 「백신에 대한 오해들」 중에서
살처분의 생명이 ‘신속함’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시스템’이 필요해 보였다. 현재는 PVC로 된 저장 탱크에 살처분한 사체들을 넣고 나중에 거름으로 재처리하는 방식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마 10년 전에는 땅에 묻으면 다 썩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처분 매립을 했을 것이다. 이후 이런 토양 오염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침출수 등이 문제가 되자, 토양이 아닌 저장조에 일단 묻는 형식으로 변했을 것이다. 물론 저장조에 통조림 또는 젓갈처럼 썩어가는 사체들도 이런 재처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대량으로 살처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57, 「생존과 존속의 문제, 백신」 중에서
“동물은 민법상으로는 물건이자 재산이고 소유권의 객체이고 형법상으로는 재물에 해당되죠. 우리의 기존 법체계 내에서는 동물의 생명 또는 동물생명의 존엄성을 반영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축전염병 방역에 있어서도 손쉽게 살처분이라는 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예방적 살처분은 질병 관리 및 방역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질병에 감염되지 않은 건강한 동물들의 생명을 박탈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보다 신중하고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 p.159~160, 「생존과 존속의 문제, 백신」 중에서
이렇게 덮어놓고 죽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아주 오랜 이기적인 관습이다. 이제는 이 관습에 의문과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 그만큼 과학이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우리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별이 아니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과학발전은 인간만을 위해 쓰려고 준 재능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런 바이러스의 위협에 동물들을 구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라는 인간의 ‘사명’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까지 동물은 죽이고 인간은 살려야만 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한 사회를 살고 있다. 백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축이라 불리는 동물에게는 쓰지 않는 인간, 코로나에는 없는 백신을 개발해서라도 빨리 달라고 아우성 치는 인간의 모습을 보라. 딜레마가 느껴지지 않는가?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 p.167, 「생존과 존속의 문제, 백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