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와인 생산지에서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한 자리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지역에 따라 심을 수 있는 포도 품종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적포도 품종의 경우, 보르도 지역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남프랑스에서는 시라나 그르나슈,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피노 누아 정도만 볼 수 있다.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따른 최적의 포도 품종들이 오랫동안의 경험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교육과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다른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 반면 관련 규정이 까다롭지 않은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신대륙의 경우, 다양한 포도나무를 하나의 포도밭에서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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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첫 번째 교황인 클레멘스 5세는 보르도 출신이었지만, 오히려 열렬한 부르고뉴 와인의 애호가였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아비뇽 인근에서 나오는 와인을 마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두 번째 아비뇽 교황인 요한 12세는 지역 와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 12세는 샤토뇌프-뒤-파프 마을에 교황의 성을 짓도록 명령하였고 직접 포도밭도 조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부터 샤토뇌프-뒤-파프의 와인이 “교황의 와인”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샤토뇌프-뒤-파프는 와인의 황제 혹은 와인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전 세계 애호가들의 입맛을 지배한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가장 사랑하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지만 샤토뇌프-뒤-파프 와인만큼은 직접 마을로 찾아가 라벨을 가리지 않은 채 시음을 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지역 와인에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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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다이나믹은 오늘날 프랑스 와인 업계에서 매우 인기 있는 농법이다. 고급 와인 애호가일수록 바이오다이나믹 와인을 찾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주류 농경학의 입장에서 종교같이 신비로운 농법을 사랑할 리 없다. 니콜라 졸리의 이웃들도 니콜라 졸리의 방식을 처음부터 좋게 생각했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종종 관계와 성과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데, 니콜라 졸리도 아마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현재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들고 있고, 전 세계 양조가들과 컬렉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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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는 농부의 발자국을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가 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품질의 포도를 수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농부들의 시간과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오랜 휴가를 보내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도, 평생 한 번도 휴가를 가보지 못한 농부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와인은 항상 훌륭했다. 농부들의 시간과 열정이 같이 블렌딩된 것처럼 말이다. 어떤 와인들은 와인 메이커의 성격을 닮기도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농부들은 종종 수확 철의 포도밭에 음악을 틀어 놓기도 하는데, 이들의 와인은 왠지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이 난다. 반면 완고한 고집쟁이 농부에게서 나온 와인은 너무 견고해서, 맛을 느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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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미국의 와인 애호가들은 가족들의 셀라에서 보관되고 있던 오래된 와인을 시음하면서 와인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는 조부모의 오래된 컬렉션을 물려받는 운이 좋은 사람들도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인 유럽의 와인에 훨씬 익숙할 것이고, 1990년대 말에 들어서야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칠레산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매우 도전적인 일일 것이다. 반면 와인 문화의 역사가 짧은 아시아의 와인 컬렉터들에게 가족들의 셀라를 물려받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유학 중에 혹은 외국의 사업 파트너를 만나며 스스로 와인을 배운 경우가 많다.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받아들이는 것도 유럽인에 비해 쉬운 편이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와인 소비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이 아시아의 와인 소비의 증가를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세계적인 유행에 민감하고, 전통보다 자신들의 입맛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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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하디에게는 남다른 두 가지 비전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블렌딩의 중요성에 대해 일찌감치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의 와인 메이커들은 자신의 땅에서 난 포도로 단순한 와인을 만들었다. 하지만 토마스 하디는 서로 다른 위치, 서로 다른 토양에서 재배된 포도들의 차이를 이해하였고, 이들을 블렌딩하여 더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만들었다. 이는 현대의 양조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술 중에 하나이다. 두 번째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즈, 말벡과 같은 프리미엄 포도 품종의 잠재력을 이해하였다. 이들을 재배하는 농가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여 포도를 구매하였고, 이 포도로 만든 와인들을 더 비싼 가격에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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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문화적인 상품이다. 와인 한잔에는 알코올과 포도즙 이상의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무라카미 류는 그의 소설 《와인 한잔의 진실》에서, 그가 마신 칠레 와인이 남미 무용수의 모습과 같다고 했다. 와인은 병이 오픈되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행한 파리의 골목을 상상하며 진열대의 프랑스 와인을 고르기도 한다. 진지한 와인 메이커들은 이런 소비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와인의 품질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이나 자신들이 만든 와인이 어떤 정체성을가지고 있는지 고민을 한다. 와인의 정체성은 종종 지역의 전통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연, 가족, 혁신, 희소성 등 다른 상품들이 가진 모든 이미지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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