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학의 생존’과 ‘근대 의학의 발전’이라는 이원화된 역사관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중국의학과 서양의학, 그리고 국가 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했다. 그리고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상호작용을 드러내기 위해 서로 무관하다고 여겨졌던 세 갈래의 역사, 즉 중국 서양의학의 역사, 중국의학의 역사, 그리고 국가의 정치사를 하나로 통합했다. 나는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세 갈래의 역사를 공정하게 다룰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상이한 범주에 속하며, 따라서 실질적으로 동떨어졌으리라 간주되던 여러 역사적 실체 간의 놀라운 동맹 관계를 밝혀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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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학은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며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새로운 생각과 인공물, 사람, 제도를 마주했다. 앞으로 다룰 몇 가지를 예로 들면 현미경, 증기기관,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 세균 이론, 근대적 병원, 사회 조사, 위생부, 록펠러 재단, 전문가주의 등이다. 중의들은 이와 같은 근대 세계의 여러 측면 앞에서 충격을 받거나 위협을 느꼈고, 때로는 매혹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근대성 담론’보다 근대 중국의학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근대국가뿐이었다. 근대성 담론은 중국의학과 과학을 화해 불가능한 대립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이로써 중국의학을 옹호하거나 개혁하려던 이들에게 힘겨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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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는 이런 표현이 없으므로 비려비마라는 말의 기원과 의미를 먼저 설명하는 편이 유용할 것이다. 이는 2,000년 전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서 처음 쓰인 문구이다. 오늘날의 신장 지역에는 구자국龜玆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곳의 왕은 한나라의 문화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신하들에게 한나라풍으로 궁궐을 짓고, 한나라풍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한나라풍의 의례와 제도를 도입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구자국의 사람들은 “나귀처럼 보여도 나귀가 아니고, 말처럼 보여도 말이 아니니, 구자국의 왕은 그저 노새일 뿐”이라며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처럼 여기에는 왕이 한나라와 구자국 모두의 문화적 전통을 배반했다는 뜻이 담겨 있고, 그런 의미에서 비려비마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화적 통합에 대한 강한 반감을 담아내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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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즈 마스크를 둘러싼 갈등은 외국인 의사들이 폐페스트와 선페스트가 구분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거부감을 보였는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이다. 호흡기를 통한 직접 감염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롄더는 위생국 직원들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자신이 고안한 거즈 마스크를 권했다. 그러나 선페스트에 대한 최신의 지식을 굳건히 신뢰하던 일본, 러시아, 프랑스 출신의 의사들은 우롄더의 분석을 믿지 않았고, 중증의 페스트 환자를 지근거리에서 대할 때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우롄더가 회고하길 그가 소속된 페스트 방역반의 선임이자 베이양의학당北洋醫學堂의 주임교수였던 프랑스 의사 제랄드 메니Gerald Mesny, 1869~1911 역시 우롄더의 발견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고, 우롄더는 분을 참지 못하여 청 조정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며칠 후 메니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러시아의 피병원避病院을 방문했다가 페스트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6일이 지난 후, 페스트 방역반의 상징과도 같았던 메니는 사망하고 말았다. 만주는 곧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제야 만주 페스트의 위험성을 인지했다.
--- p.33~34
중국 사람들은 보통 중국어 ‘과학화하다科學化’를 서양 단어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영어 ‘scientize’는 사실 제대로 된 단어가 아니다. 워드프로세서에 ‘scientize’를 입력해보라. 맞춤법 검사기는 모조리 빨간 밑줄을 그어댈 것이다. 컴퓨터가 틀린 것 같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찾아보라. ‘scientize’가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나오는 몇 안 되는 인용문에서조차 따옴표에 둘러싸인 경우가 태반이다. ‘과학화하다’라는 말은 분명 과학이라는 개념에서 자연스럽게 바로 도출된 단어처럼 보이지만, 근대 과학의 개념을 함께 벼려낸 유럽의 국가들은 ‘과학’을 동사로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극명히 대조적으로 현대의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는 ‘과학화하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는데 말이다. 따라서 중국인이나 일본인, 한국인이라면 서양인이 ‘과학화하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과학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의아할 수 있다.
--- p.143
1920년대 중국의학을 둘러싼 여러 근대화 담론 가운데 중국의학을 옹호하던 이들이 별달리 저항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중약이 자연 원료인 ‘초근목피草根樹皮’, 즉 풀뿌리와 나무껍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이는 중국의학을 원시적이라 폄하하는 표현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릇된 이론에 의해 퇴색되지 않은 값진 요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의학이 단지 중국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웃음거리’로 취급되던 시절, 중국의학을 깔보는 표현을 중국의학이 완전히 무가치하지는 않다는 뜻으로 전유한 것이다.
--- p.193
정치적 전략과 학문적 혁신의 ‘불가분의 이중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비려비마’로 정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표현은 이 책의 서두에서 제기된 문제의 열쇠를 제공한다. 중국의학은 어떻게 근대성에 대한 안티테제에서 중국 고유의 근대성을 표상하는 유력한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었는가. 나는 이러한 이행이 근대 중국의 정치사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대신, 나름의 흐름을 지닌 중국의학의 역사가 근대성과 국가의 정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념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중국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비려비마’라는 멸칭이 붙은 새로운 의학의 발흥이었다. 새로운 의학이 어렵게 얻어낸 성취는 중국의학이 근대성의 안티테제가 아닐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 p.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