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기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이 시기는 그저 ‘암흑’의 시대, ‘절망’의 시대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실제로 식민지화된 국가에서 살았던 이들에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이전의 전통사회와 지금의 현대 사회 사이에서,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의 문화적 충격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튕겨내야 했던 ‘역동적인’ 시대였던 것도 사실이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들어온 외국의 새로운 사상, 철학, 지식, 문예, 심지어 생활 방식은 끊임없이 그 시대 젊은이들을 자극했다.
--- p.10,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1930-50년대 문예인들의 지적 계보」,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중에서
1930년대 문인-화가, 이 예술가들을 묶어준 것은 일상의 공간이자 문화사적 공간인 다방, 카페, 영화관 등이다. 적빈과 실업으로 너덜해진 일상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면서 그들이 그들 삶의 중심에 들어앉힌 것은 교만하고 고집 센 예술가의 자의식으로 가득찬 ‘거리의 예술’이었다. 전시의 1부에 펼쳐진 다방, 영화관 등의 공간과 미샤 엘만의 음악, 르네 클레르?장 콕토의 영화 목록이 ‘거리예술’의 진면을 확인해 줄 것이다. 김기림이 신문사 일을 마치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며 산책하던 태평로, 광화문통 등지에 다방, 카페, 영화관이 미로처럼 놓여있었다.
--- p.29, 「‘문학예술의 황금시대’를 소환하는 방법, 들과 화가들이 ‘따로 또 같이’ 짓부친 글, 그림, 책의 이야기들」, 조영복(문학평론가,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중에서
신문소설의 삽화 “틀을 깨고 인민 속으로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가장 새롭고, 가장 강력한 미술 양식에 인쇄미술이 있다.”
--- p.102, 정현웅, 「틀을 돌파하는 미술」, 『주간서울』, 1948.12.20 중에서
달포를 두고 내리 찧는 장마는 마침 오 년 이래의 기록을 깨뜨려 버리고야 말았다. 집이 뜨고 사람이 상하고 마을이 헐고, 백성의 마음이 불안하였다. 마작군과 떨어져 침대 위에 누워서 신문을 두적어리는 정주사의 가슴속은 심히 안타까웠다. 그것은 그러나 집이 뜨고 마을이 헐은 것을 슬퍼하여서가 아니라 시골서 경영하는 정어리업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달포지간의 장마는 고기잡이를 온전히 봉쇄하여버렸고 그 위에 폭풍우는 바다에 나갔던 다섯 척의 어선과 어부를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집어 삼켜버렸던 것이다.
--- p.106, 이효석 작, 안석주 화, 「마작철학(麻雀哲學)」, 『조선일보』, 1930.8.17 중에서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숭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았다. 오로촌이 맷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았다.
--- p.227, 백석, 북방에서 -정현웅에게- 중에서
이 오죽잖은 나한테도 아는 친구 모르는 친구한테로부터 시혹(時或) 그림 장이나 그려 달라는 부질없는 청을 받는 때가 많다. 내 변변치 못함을 모르는 내가 아닌지라 대개는 거절하고 마는 것이나,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할 수 없이 청에 응하는 수도 있고, 또 가다가는 자진해서 도말(塗抹)해 보내는 수도 없지 아니하니, 이러한 경우에 택하는 화제(畵題)란 대개가 두어 마리의 게를 그리는 것이다.
--- p.303, 김용준, 「게」, 『근원수필』, 1948 중에서
다방이 근대식 취향을 공유하는 현실의 공간이라면 신문, 잡지와 같은 인쇄 출판 지면은 미술가와 문인들이 보다 광범위하게 공유했던 또 하나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신문과 잡지에 실리는 신문소설을 비롯하여 각종 기행 형식의 글과 그림, 화문(畵文)에서부터 장정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는 미술과 문학의 장르 간 경계 넘기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제도적으로는 영화, 사진, 상품 광고 등 새로운 시각문화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 독자층의 증가와 출판 자본주의의 성장이었으며, 문학과 미술계 내부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예술론에 대해 반발하고 나온 모더니스트 세대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인쇄출판 지면을 매개로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372, 「1930년대 출판시각문화 속의 미술과 문학」, 권행가(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중에서
어쨌든 ‘떠나야만’하는 운명은 ‘파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가족’과 ‘인간’을 위해, 무엇보다 예술을 위해 ‘파리’를 향해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나혜석의 ‘파리행’은 비극적 운명감을 내재하기는 했으되 현실화되었지만, 1930년대 문인들의 ‘파리행’은 기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제시대 통틀어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텍스트를 선보였던 이상에게 ‘파리’는 ‘19세기적 조선’에 절망한 자의 탈주의 궁극적 도달점이었다. 김기림은, ‘여행으로부터 구원의 혈로를 구한 시인’인 보들레르와, 〈유령 서쪽으로 가다〉의 르네 클레르를 ‘날개’의 시인 이상에 견준다. 이상의 ‘파리동경’을 예술의 유목주의뿐 아니라 유이민 역사의 비극에 투사함으로써 이상의 파리동경의 궁극적 결말이 비장하게 실패할 것임을 암시한다.
--- p.385-386, 「파리(Paris)를 ‘살기’ 위하여, 파리를 ‘넘기’ 위하여」, 조영복 (문학평론가,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중에서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화가들도 신문지면을 무대로 활동했다. 소설이 신문의 대중화와 부수 확장에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면서 삽화의 분량이 증가하자 신문사는 삽화를 그리는 화가들의 직장이 되었다. 삽화가의 탄생이었다. 더하여 신문 만평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개척되면서 기자, 문인, 화가(또는 삽화가)는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대중에 다가서다가 점차 전문성을 띠게 되고 분화(分化)하여 독립적인 분야를 구축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소설 쓰는 기자 겸 문인, 그림을 그리면서 글을 쓰는 문인?화가도 있다. 소설 삽화를 그리거나 풍자만화와 연재만화를 그리면서 이른바 ‘만문(漫文)’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 p.398, 「기자, 문인, 화가의 신문사 동거」, 정진석(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중에서
소설 삽화가 제공하는 생생한 이미지는, 근대 소설 형성기의 작가들로 하여금 ‘묘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반대로, 시각적 이미지와 변별되는 소설 언어의 미학을 탐색하는 동안, ‘소설의 본질이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깨닫는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소설이 대상을 초점화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1910년대 신소설을 지나는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소설의 이러한 변화가 삽화의 등장과 맞물려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삽화가 근대적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자각하게 만든, 이른바 ‘예술적 타자’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얼마든 존재하는 셈이다.
--- p.415, 「소설을 그리다, 삽화를 읽다.」, 공성수(경기대학교 교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