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왜 저토록 아름다운가
오름과 유채밭과 너럭바위와 보리밭
제주는 왜 그토록 예쁜가
올레와 밧담과 도댓불과 검은여
제주말은 왜 이토록 정겨운가
옵서 햇저 수다 라게
저토록 아름답고 그토록 예쁘고 이토록 정겨운 터가
잔인한 죽임과 억압과 굴종의 현장이었음을 떠올릴 때마다
아름다워서 더욱 슬프고
예뻐서 몸이 떨리고
정겨워서 어쩔 줄 몰라 하게 된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더욱 처절한 슬픔이 잠든 곳, 제주.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의 춤판’이 자행된 이후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허물어진 채 서로가 서로의 운구를 하며 오름 산자락 곳곳마다 절명과 통곡의 뼛가루를 쌓아두었던, 그 길고도 험한 시간들. 생가슴을 예리한 칼날로 마구 후벼대던 학살자들의 이데올로기는 또 얼마나 흉폭했던가? 광기에 더한 야만의 ‘빨갱이 놀음’ 앞에서 질식 상태로만 오로지 모질고 모진 구차한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던 굴종의 세월들은 또 어떠했을까?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제주의 역사 앞에선 “우리는 모두 상주다.”라고. 어찌 보면 이 책은 현기영 선생이 1980년에 발표한 『순이삼촌』에 대한 감상문일 수도 있다. 너무나도 뒤늦게 제출하는 독후감이지만 9년이 넘는 긴 시간의 준비 끝에 방대한 내러티브로 엮은 ‘육지것’의 쑥스러운 헌사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가는 『순이삼촌』에게서 받은 충격과 광기를 40년 이상 몸속에 담아 두었다고 고백한다. 벗어나지도 못하고 더 다가가지도 어려웠던, 그래서 천형보다도 짙은 4.3의 서사가 추상같이 명령하는 소리가 더 이상 멀어지기 전에 온몸으로 그 기억들을 새기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책 『폭낭의 기억』은 제주4.3의 굽이치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 한라 백록담의 깊은 곳 혹은 바다로 흘러간 어느 곳에 서려 있는 제주인의 염원과 비장함을 찾아가는 서사가 되고자 한다. 어쩌면 한 송이의 꽃이 되어 인류 가슴에 드리워진 이상(理想)처럼 근원에 대한 갈망과 만나려는 힘겨운 분투일 수도 있다.
제주4.3 73주년에 부치는 서사,
9년의 탐사 끝에 써 내려간 제주4.3 역사소설!!
이 책이 가리키는 지점은 명확하다. 가쁜 숨마저 허락지 않았던 제주4.3 수난사의 근원과 끝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작가는 역사적 실재와 만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며 학살의 현장과 통곡의 원혼이 아직껏 잠들지 못한 곳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 역사의 물살이 빨라지는 지점을 응시했고 짙은 서사를 간직하면서도 그 상흔만을 드러낸 채 말이 없는 한라 숲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짓이겨지고 흩어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또 그것들이 숲을 이룬 곳에서 국가권력의 폭력을 숨 막히게 목격했다.
나는 4·3의 급류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도정에서 작은 물줄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위로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불었다. 계절이 바뀌며 눈도 내리고 비도 내렸다. 대한해협 건너 히로시마에 내리는 ‘검은 비’도 시야 안에 들어왔다. 이 책 『폭낭의 기억』 그 작은 물줄기들이 써 내려간 서사이다. 또 구름과 바람, 눈과 비 그리고 ‘검은 비’의 이야기들이다.
지난 9년간 나는 쉼없이 그 물줄기를 따라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물줄기 속에 있거나 물줄기와 하나가 되는 상상에 빠지곤 했다. 내가 만난 물줄기와 나의 상상들은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것들을 정성스럽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슬픔과 좌절, 고통과 염원이 뿌리 뽑힌 채 나뒹굴고 마모되고 신기루처럼 증발하고 해체되어버린 그 누군가의 기억도 분명 있을 것이다.
작가는 제주4.3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탐문했다. 9년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각종 보고서, 논문, 기사, 사진, 토론자료집, 소설, 시, 판화 등도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국내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일본 측, 미국 측 자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같은 작업하에 1차분(전 5권)에 해당하는 원고지 6,500여 장의 장편 역사소설이 시작되었다. 그중 1-2권이 이번 73주년을 앞두고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심층 취재를 통한 역사적 실존 인물이 작품 속에서 상당수 등장한다는 점 또한 이 책의 가치를 더하는 대목이다.
아일랜드 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 도슨 신부는 4·3수난이라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 물살이 빨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만난 역사적 실재 인물이다. 신홍연 스님, 오이화 스님, 윤종선(실명 고정선) 스님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의 실재 인물들은 그밖에 김익렬, 김달삼 등 십여 명 남짓 된다. 실재 인물의 삶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상의 옷을 입힌 인물들도 다수 등장한다. 김율, 김건, 고바랑, 고매랑 등은 나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인물들이다. 하지만 4·3의 급류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당시 살고 있던 누군가가 생각이 나게 하는 그런 인물들일 것이다.
하귀국민학교, 하귀중학원, 대정중학권, 수산사, 외꼴절, 비해기동산, 제주농업학교,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 에바조선소, 오키나와 야카(屋嘉) 포로수용소, 하와이 호노울리울리 포로수용소 등지도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장소들이다. 그 외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소는 경우에 따라서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거나, 빈터로 남아 있거나, 명칭이 바뀌었거나, 명칭은 그대로인 채로 멀지 않는 곳으로 이전해 있다.
소설 속 주요인물들은 작가가 얘기하듯 4.3의 급류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도정에서 만난, 70여 년을 훌쩍 넘긴 시차를 두고 기억 하나씩을 책 속에 새기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따라가 보면 1940년대 초반부터 펼쳐지는 격랑의 서사가 파노라마처럼 넘실댄다. 해서 이 소설은 그 시대를 관통하며 그 누구보다고 치열하게 분투하며 좌절하고 또 아파했던 사람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시 장치가 장착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4.3 수난사의 넘실거리는 서사가 그 기록으로 새겨지게 된다.
인류사를 잠식한 국가권력의 가공할 폭력,
그 정점에서 ‘폭낭’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 2003년 10월 31일,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과 4.3 피해자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제주4.3이 국가권력의 잘못(폭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이에 대해 국가원수로서 정중하게 사과한다는 취지였다. 그는 “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불행한 역사를 매듭짓고 4.3의 교훈을 인권과 평화로 승화시키자고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15년 후 문재인 대통령 역시 70주년 추념사를 통해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린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가해자 국가권력 스스로가 피해자들에게 모든 잘못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처벌하는 경우는 인류 역사상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두 대통령의 진일보한 역사인식과 사과 발언에도 불구하고 4.3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 수천만 인디언들을 도륙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침략사가 보여주는, 수백만 노예들의 존엄을 총칼로 짓밟았던 백인 제국주의 침탈이 여실히 증명하듯 가공할 권력은 스스로를 단죄할 순 없다. 그것이 가능한 길은 오로지 국가권력의 폭력과 범죄행위를 단죄할 힘을 피해자들이 가질 때뿐이다.
이 같은 참혹한 역사와 야만의 시대가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재현되었고 그 정점에 제주4.3이 놓여 있다. 이 소설의 시선은 국가권력의 가공할 폭력 앞에 고스란히 적나라한 속살을 드러낸 사람들을 향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무거운 서사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간다.
피해자는 여전히 순한 양으로 살아가고 가해자가 여전히 늑대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한번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던 피해자의 저항이 무력화되었을 때는 예전에 비해 몇 배 이상의 가혹한 보복이 돌아온다. 그 보복은 맹수들 세계보다 인간 세계에서 더욱 가혹하다. 특히 그 가해자가 권력일 경우에는 더더욱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며 악랄하다. 그 보복은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로 확대되고 대를 잇는다. 육체적 박해, 재산 강탈, 사회 활동 제한, 나아가서 집중적인 감시와 사상교육을 거쳐 자식과 동생, 친구로 하여금 권력에 저항했던 아비와 형과 친구를 지탄하도록 만들며 가해자 집안에 자발적으로 충성하도록 인간을 개조한다. 개조된 인간은 가해자들에 의해 모범으로 추앙된다. 가해자는 이렇게 해서 칼 한 자루 없이도 영원한 지배권력을 완성한다.
제주는 항일 독립운동의 본산지였고 권력에 의한 가혹한 폭력과 보복에 시달린 4.3을 겪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전쟁 기간 많은 청년들이 국방군에 지원했으며, 국방군 내의 귀신잡는 해병대란 전통과 별칭을 만들어낸 것도 그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면에는 어떤 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권력에 의한 가혹한 보복에서 벗어나고자 혹은 빨갱이 집안이란 오명에서 벗어나려는 극단적인 몸부림이었다. 권력에 의한 폭력은 아버지와 자식을 갈라놓고 친구와 친구를 갈라놓으며 인간성을 파괴하고 말살시켜버린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폭력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선 소설 속 인물들은 제주 전역에 선혈을 남기며 스러져간다. 실제의 역사 그대로,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진 외로운 동백의 꽃잎처럼. 그 광경을 ‘폭낭’(팽나무의 제주도 방언)이 지켜본다. 제주 이 마을 저 마을에 당나무(마을을 지키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나무)가 되어 ‘검붉은 역류의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며 아득한 시간을 건너 침묵했을 터이다. 폭낭 가지가지마다 수많은 원혼들의 상흔만은 고스란히 품은 채로.
작품 속 작가의 눈은 폭낭에 새겨진 그 상흔을 관찰한다. 거기에 묻어 있는 기억들이 곧 격랑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4.3 역사 정중앙에 새긴 비원의 시작과 끝을 찾는 단서일 거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얼룩진 채 알알이 새겨져 기억하고 있는, 수십 년의 밤이 되풀이되어 찾아와도 잠들 수 없는 날들의 긴 서사들을 마주하는 시간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폭낭이 저 멀리 한라를 기약 없이 바라보면서도 놓지 못한 기억들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과거를 오롯이 기억한다는 것은 오늘의 나를 뚜렷이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 순간 과거 역시 움직이면서 현재를 새롭게 응시하고 나를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폭낭에 담긴 기억은 사라진 자들과 지켜본 자들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의 시선 역시 그 기억들과 감응하는 여정임이 틀림없을 것이며, 이것이 이 작품을 만나는 약속 장소가 될 것이라는 작가의 바람과 맞닿아 있는 역사인식이라고 덧붙이고 싶은 대목이다.
“나는 급변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변화해 나가는 인물상을 그리고 싶었다. 아마도 그 변화의 종착점에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각 개인들의 시련을 딛고 희망이 실현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이 환상적이고 비약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엄연한 현대사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세대를 이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인물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