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은 참 특별하고 특이하다. 우리는 소개팅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거절’해야 한다. 누군가를 만나서 거절을 하는 경우는 흔히 비즈니스 미팅이나 면접 상황일 때가 많다. 즉, 소개팅은 ‘연애’라는 비즈니스를 두고 상대방이 내 연인으로 적합한지 ‘면접’을 보는 상황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작위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잘 거절하는 것이 매너이고, 또 그런 거절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소개팅이기도 하다.
이런 만남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이런 만남을 통해 내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나라는 사람 자체가 이성으로서 거절당하는 이 상황에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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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다음 날도 우리는 출근을 한다. 대학교 때에는 이별을 하고 나면 한 삼 일간 기숙사에 처박혀 수업도 안 가고 원 없이 슬픔에 파묻혀 있었지만, 회사의 돈을 받는 직장인이 되어서는 쉽게 그리할 수가 없다. 나에게는 어제와 완전히 달라져버린 오늘이지만, 회사에 가서는 어제와 똑같은 일상을 살고, 똑같은 이슈를 맞이하고, 똑같은 웃음을 지어야 한다. 어른의 이별은 이렇듯 마음껏 슬퍼할 시간을 갖는 것조차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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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쏟고, 너의 모든 것을 받았던 연애가 끝나고 나면, 과연 내가 다시 다른 누군가와 그런 연애를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든다. 이런 회의감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고,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불안해진다. 모든 것을 쏟았을 때 내게 돌아올 상처의 깊이를 알기에 관계에 대해 소극적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 일이 반복될수록 다시 누군가와 오래 사귈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은 더욱 깊어진다. 악순환의 반복. 긴 연애를 끝낸 이가 감당해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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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으로 점철된 나의 연애사. 덕분에 나는 그녀들의 이상형이 되기 위해서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서른네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그녀들의 이상형이었다.
매일매일 요가원에 다니는 그녀는 함께 요가를 할 수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날 바로 조용히 회사 근처 요가원에 등록했다. 결국 그녀와 잘되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2년째 요가원에 다니며 몸과 마음을 충전하곤 한다.
여기저기 여행 다니기를 좋아해 운전을 잘하는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그녀를 위해, 회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는 내가 차를 샀다.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지만, 그 차 덕분에 나 역시 좋은 사람들과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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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에게 와서 헤어지지 말자고 이야기한 날. 가라앉은 눈빛과 차분한 말투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오빠, 나 ○○야. 이렇게 손을 잡고 있잖아. 이제 나 안 좋아? 나 다시 오빠가 없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 싫어.”
절절한 그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끝내 힘주어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고, 낮은 목소리로 우리가 헤어졌음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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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을 원하는 걸까?’
각자가 생각하는 연인, 이상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린 결론은 이랬다.
연애는 결국 세 가지다. 밥, 영화 그리고 여행.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식사 약속을 잡는 것이다. 평일 점심, 평일 저녁, 주말 점심, 주말 저녁으로 갈수록 기대하는 관계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번 주말에 뭐 해요? 시간 있으면 저녁 같이 먹을래요?”라는 말보다 확실한 의사 표현은 없다고 봐야 한다. 소개팅은 가장 직접적으로 연애를 지향하는 만남이기에, 관계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식사로 넘어간다.
하지만 밥을 건너뛸 수는 없다. 그만큼 함께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모든 관계, 특히 연애에서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관계가 깊어지면 현대인들은 영화를 본다. 영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오락이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가격 대비 얻는 만족도도 매우 크다. 그리고 대중문화답게 취향과 선호의 카테고리가 한정적이라서, 상대방의 반응을 예상하기가 쉽고, 그만큼 선택의 실패 확률도 낮다. 이렇게 복잡하게 원인을 따져보지 않더라도, 그냥 보통의 연애를 하는 우리가 데이트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영화 보는 것이다.
--- p.251-252
급할 것 하나 없기에 고구마대를 까며, 드라마를 보며 그렇게 엄마랑 마주 앉았다. 그러다 엄마의 조심스러운 물음.
“아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고?”
‘실은 작년에 소개팅 몇 번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소개팅에 나온 분들은 다 좋았는데 이상하게 상황 때문인지 마음이 안 가더라고요. 그러다가 우연히 좋은 분을 만나 짧게 연애도 했어요. 근데 장거리 연애였던 탓인지 길게 못 만나고 헤어졌어요. 헤어지고 조금 힘들었는데, 엄마 걱정하실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어요. 나 힘들어하는 거 알면, 멀리서 엄마도 힘들어하실 거잖아요.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나면 슬쩍슬쩍 짝사랑도 해보지만, 다들 짝이 있거나 저 좋다는 사람은 없더라구요. 저도 매일매일 사랑하고 싶어서, 좋은 사람 만나고 싶어서 애를 태우는데…’.
“네, 뭐 별일 없어요.”
삼십 대 중반, 여자 친구도 없는 아들을 둔 엄마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조급해지나 보다. 아니, 어쩌면 아들이 불편해할까 봐 말씀은 안 하시지만 이미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 p.276-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