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가상들’, 드러나는 자본의 ‘실체’ ― ‘재생산’ 관점으로 보면 자본에 의한 시각적 기만이 사라지고 실상이 드러난다이 책의 저자 고병권을 따라, 자본의 생산과정을 ‘재생산’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 지금 자본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 즉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계속 반복된 일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일이라면, 독자는 그 사실을 통해 무엇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가가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자본의 생산과정을 순차적으로 다루어왔다. 그러나 이제 ‘재생산’을 고려하면 이른바 ‘등가교환’이 이루어지던 그 첫 장면이 절대적 출발점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 전에 먼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생산과정은 유통과정에서 제공된 것을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다. 이렇게 ‘재생산’ 관점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기존에 나타난 외견상의 가상, 즉 생산영역과 판매영역 그리고 유통영역이 각각 ‘독립성’을 갖고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가상을 제거할 수 있다. 개별적 자본, 개별적 자본가와 노동자만 볼 때는 모든 것이 따로따로 보였으나 이제는 ‘전체’, 즉 사회적 총자본과 전체 자본가가 보인다. 또한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생산을 바라보면 자본가가 ‘노동력에 대한 지불자’라는 가상이 사라진다. 쉬운 이해를 위해 부역 농민의 예를 들어보자. 부역 농민이 일주일에 사흘은 자기 경작지에서 자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고 나머지 사흘은 영주의 농지에서 부역 노동을 한다고 해보자. 이 경우, 부역 농민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누구에게 받을까. 당연히, 부역 농민 자신이다. 그는 전체 생산물 중 절반은 자기 몫으로 갖고 나머지 절반을 영주에게 준다. 자기 몫도 자기가 생산하고 영주 몫도 생산해주는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처럼 노동기금(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생활수단의 총량)이 화폐형태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부역 농민은 자신에게 지급된 생산물이 자기가 직접 키워낸 생산물임을 분명히 안다. 또 노동자의 경우처럼 자발적으로 노동력을 판매한 것이 아니기에, 부역 농민은 영주의 몫으로 제공한 것이 ‘강제로’ 바친 것임을 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주가 경작지, 종자, 가축 등 부역 농민의 생산수단을 모두 몰수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부역 농민은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영주에게 ‘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주에게 ‘고용’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조건이 불변이라면 부역 농민은 여전히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사흘치에 해당하는 생산물을 임금으로 받게 된다. 일주일 중 사흘은 자신의 생활을 위해, 사흘은 영주를 위해 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사태는 완전히 달라 ‘보인다’. 지불자의 이미지가 뒤집히는 것이다. 이전에는 부역 농민 자신이 자기 노동력에 대한 지불자였으나 이제는 영주가 ‘지불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주가 생산물을 얻기 위해 농민을 고용하고 노동력에 대해 지불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부역 농민은 임금노동자가 된 뒤에도 여전히 자기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가치(노동기금)를 스스로 생산하고 거기에 더해 자본가가 된 영주를 위한 잉여가치도 생산하는데, 비추인 모습은 정반대다. 그는 자기를 먹여 살리고 영주도 먹여 살리지만 외견상으로는 영주가 그를 먹여 살리는 듯 보인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게다가 자본가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노동자 자신에게도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재생산’의 관점에서 전체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다시 보면, 그 시각적 기만이 사라지면서 실상이 드러난다. 재생산의 관점에서 고찰한다면, 자본가가 들고 있는 자본은 모두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라는 점, 심지어 그것은 아무런 지불 없이 취한 불불노동이라는 점이 이렇게 드러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일반적인 상품 및 화폐의 유통만으로는 자본이 생겨날 수 없다. ‘증식하는 가치’로서 자본이 존재하려면 가치증식을 가능케 하는 상품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노동력’이다. 노동력 구매자인 자본가는 판매자인 노동자에게 일정한 값을 치르고 노동력을 ‘계속해서’ 구매한다. 구매 이후 생산과정에 머무는 동안 노동력은 자본가의 전유물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써서 끊임없이 생산물을 만들어내는데, 그 생산물은 마치 효모 노동의 산물이 모두 양조업자의 것이듯 결국 자본가의 것이 된다. 자본이 재생산된다는 것은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뜻이다. 노동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잃어버린 채 타인의 부를 생산한다. 이렇게 자본의 생산이 반복되면 언제부턴가 자본가가 들고 온 돈은 그 성격이 완연히 바뀌어 있게 된다. 구매자로서 자본가가 들고 있는 돈은 그동안 그가 노동자로부터 ‘등가물 없이 취득한 가치’ 즉 ‘불불노동’일 수밖에 없다. 이로써 우리는,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력에 대한 ‘등가교환’ 역시 단지 외관이고 형식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노동력의 거래’에 관한 한 등가로 지불한다 해도 기본적으로는 ‘착취’라는 이야기다. 즉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기존에 ‘등가교환’이라고 생각했던 노동력의 거래마저 실은 ‘가상’이었음이 드러난다.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자의 재생산이자 가난의 재생산 ― 자본관계의 재생산, 자본의 부속물로서의 노동자계급고병권은 『자본』 제7편에 이르면 마치 카메라가 줌아웃 된 것처럼 시야가 확대된다고 했다. 자본의 재생산을 보려면 이성의 시야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 사회적으로도 크게 넓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총자본가 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자 즉 노동자계급’의 관계에 주목해보자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노동력의 거래란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거래인 동시에 화폐소유자와 상품소유자 간의 거래이며, 이를 ‘계급’이라는 시각으로 치환해보자면 노동력 거래란 곧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거래다. 앞서 보았듯 마르크스는 재생산의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자본의 생산과정을 둘러싼 여러 가상을 제거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본의 재생산이란 곧 자본을 가능케 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곧 자본의 재생산을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재생산’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자본이 재생산된다는 것, 즉 노동력이 재생산된다는 것은 노동자가 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할 자본을 계속 생산하고(소외된 노동의 반복), 자본가는 그런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서 노동자를 계속 생산한다는 의미가 된다.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생산영역에서 생산요소들을 소비하는 것을 ‘생산적 소비’라 했고 유통영역에서 생활수단을 구매해 일상에서 소비하는 것을 ‘개인적 소비’라 했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을 생산적으로 소비하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며, 또한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은 화폐로 생활수단을 구매하고 소비하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다시 말해 임금노동자로서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 노동자에게 생산적 소비(노동)의 시간과 개인적 소비의 시간은 전혀 별개인 것처럼 보인다. 전자가 ‘자본가의 삶’을 생산하는 시간이라면 후자는 ‘노동자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달라진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지 않는 그 시간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에서 그것은 노동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노동자에게 개인적 소비의 시간이 주어진 것은 사실 생산적 소비를 위해서다. 먹기 위해 일한다기보다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는 공장에 가지 않을 때조차 ‘노동력’으로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기름칠’을 하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양육함으로써 자식 노동자까지 키운다. 그 덕분에 자본가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노동자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을 “노동자의 자기유지 본능과 생식 본능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 그런데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에는 노동력을 생산한다는 것 말고도 자본가에게 유익한 점이 있다고 저자 고병권은 강조한다. 개인적 ‘소비’가 노동자를 결국 가난하게 만들고, 이 ‘가난’이라는 놈이 자본가의 하수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난’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출현하는 역사적 조건이기도 하고(생산수단을 상실한 인구의 집단적 출현) 노동력의 지속적 공급을 보장하는 현실적 조건이기도 하다. 요컨대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면서 가난을 재생산한다. 노동자들은 소비를 통해 가난해져 다시 맨 몸뚱이로 자본가 앞에 설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도무지 자본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임금이란 말뚝에 매어놓은 줄과 같습니다. 일하는 짐승에게 여기저기 풀을 뜯을 수 있는 여유를 주지요. 하지만 줄을 반경으로 하는 원 안의 풀을 다 뜯고 나면 별수 없이 또 일하러 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 풀 있는 곳으로 말뚝을 옮겨줄 테니까요. - 본문 80쪽,「3장 드러나는 계급관계」에서축적과 착취와 엉터리 도그마에 관하여 ― 노동자계급이 끝내 투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번 책 『자본의 재생산』은 그동안 살펴본 ‘자본가와 노동자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개별 노동자와 개별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을 생각하는 순간,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매하는 일은 노동자에게 결코 벗어나기 어려운 운명이다. 그리고 이 운명은 노동자 한 사람의 운명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운명이고, 한 세대 노동자가 아니라 전 세대 노동자에 걸쳐 있는 운명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상품과 잉여가치만 생산하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관계도 생산한다.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자본의 재생산이란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라고. 자본의 ‘축적’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자본관계의 재생산’을 통한 착취가 지속되고 강화된 덕분이다. 빈곤의 축적, 빈민의 축적이 무서울 정도로 이루어진 덕분에, 즉 노동자를 최대한으로 닦달한 덕분에(임금을 강제 인하하거나, 고용을 늘리는 대신 노동일을 늘리거나, ‘시간외노동’을 시키거나, 노동강도를 높이는 식으로) 자본축적도 가능했다. 착취가 늘어날수록 축적도 늘어났다. 그런데 제러미 벤담 등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사회적 자본의 크기가 고정된 것처럼 다루면서 특히 노동기금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는 엉터리 도그마를 퍼뜨려 이런 착취를 고착시켰다. 즉 노동기금은 정해져 있으니 노동자는 그 안에서만 자기 몫을 계산하면 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도그마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노동자는 사회 전체의 생산물 중 생산에 얼마를 투자해야 하는지 정하는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떠먹을 수 있는 수프 접시의 크기는 정해져 있다”라는 그 주장에 대해, 노동자들이 떠먹는 수프는 전체 국민의 노동생산물, 즉 사회 전체 부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 접시에서 노동자들이 더 많이 떠내지 못하는 것은 접시가 작기 때문도 아니고 접시 속 내용물이 빈약해서도 아닌, 단지 노동자들이 자기 몫을 떠내는 “숟가락이 작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힘 관계는 대칭적이지 않습니다. 자본가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지요. […]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저항적이고 방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말합니다. 임금 인상 투쟁의 99퍼센트는 기존의 가치라도 유지하려는 투쟁이라고. 게다가 이 투쟁의 기본 성격은 노동력을 파는 것 말고는 살길이 없는 노동자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의 가격을 제대로 받아보려는 것이라고. - 본문 174쪽, 「6장 ‘노동자계급의 밥그릇’에 대한 엉터리 도그마」에서이런 현실 앞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약탈적 침해에 대한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구제할 수 없는 가련한 무리로 전락할 것이다.” 약탈에 저항할 줄 모르고, 조금 나아질 수 있는 기회조차 이용하지 못한다면 노동자계급에게는 아무런 가망도 없다는 뜻이다. 저자 고병권은 북클럽자본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자본』을 추리소설에 비유한 바 있다.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추적하는 범죄는 체제를 위협하는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체제 자체가 저지르는 범죄라고도 했다. 마르크스가 추적하고 고발하는 범죄는 바로 그것, 자본의 범죄이고 자본주의의 범죄다. 자본의 재생산을 다루는 이번 책 『자본의 재생산』에서 독자는 드디어 ‘자본주의’라는 범죄자를 대면하게 된다. 심지어 개별 자본가조차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거대한 착취와 예속의 기계가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