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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카의 여행

실카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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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문신가
[도서]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헤더 모리스 저/박아람 역 북로드
10% 3,510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4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568g | 135*195*18mm
ISBN13 9791158791582
ISBN10 115879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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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묻지. 나치와 잤나?”
“그들은 나의 적이었습니다. 나는 이곳에 끌려온 전쟁 포로였고요.”
“나치와 잤나? 그렇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를 이곳에 끌고 온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첫 번째 요원이 일어선다. “세실리아 클라인, 너를 크라쿠프로 보낸다. 그곳에서 너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실카를 쳐다보지 않는다.
실카가 일어선다. 이럴 수는 없다. “안 돼요. 나한테 이럴 순 없어요. 나는 전쟁 포로일 뿐이에요.”
--- pp.15-16

옆에 앉은 사람에게 이름을 묻는 소리가 다른 곳에서 들린다. 금세 화차 안이 속닥거리는 소리로 가득 찬다. 서로 언어가 다르다 보니 이 언어 저 언어가 왔다 갔다 하며 국적이 한데 뒤섞인다. 그래도 대화는 통한다. 빵집을 하던 한 폴란드 여자는 나치에게 빵을 파는 바람에 나치를 도왔다고 고발되었다고 했다. 다른 여자는 독일 선전물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고 했다. 또 다른 여자는 나치에게 잡혔는데 같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받아 스파이 혐의를 받고 기소되었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던 가운데 놀랍게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 pp.24-25

실카가 햇살이 부셔 눈을 가린다. 작은 도시를 닮은 수용소를 바라본다. [...] 경계선 너머로 작은 언덕이 보이고 그 위로 크레인처럼 생긴 커다란 장비가 우뚝 솟아 있다. 그들을 둘러싼 철조망 여기저기에는 감시초소가 흩어져 있지만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위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카는 철조망 꼭대기를 유심히 쳐다본다. 전기가 흐르는지 알 수 있는 절연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철조망 너머로 지평선까지 뻗어나간 황량하고 척박한 땅덩이를 보고 있자니 전기 철조망 따위는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 밖으로 나가면 생존이 불가능하리라.
--- pp.48-49

누군가 뒤에서 조시를 세게 밀친다.
조시는 몸을 가누려고 손을 뻗다가 그만 난로 연통을 잡고 만다.
그녀의 비명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진다.
조시가 마치 몸에서 떼어버리려는 듯 팔을 뻗는다. 다치고 병든 여자들의 모습,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 실카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안 된다. 조시는 안 된다. 실카는 조시를 붙잡고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가 드문드문 쌓이기 시작하는 눈 속에 조시의 손을 파묻는다. 조시는 이 사이로 숨을 거칠게 내쉬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쉿! 조용히 해.” 실카가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조금 더 가혹하게 말한다.
--- p.77

의사는 실카를 유심히 살핀다. “당신은 언어에 재능이 있어요. 알다시피, 이곳은 환자 수에 비해 일손이 부족해요. 여기서 일해보지 않을래요?”
기회다. 수용소에는 밖에서 하는 육체노동처럼 힘든 일도 있고 편한 일도 있다. 그곳에서 ‘편한’ 일은 음식과 온기를 의미했다. 하지만 실카에게 그 일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착취당하고 캠프에서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을 목격하는 일이기도 했다. 25구역장, 그것은 그녀에게 형벌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실카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왜 늘 눈에 띄는 것일까? 또다시 알 수 없다. 조시를 바라본다. 만약 그녀가 이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친구를 배신하는 일이 된다. 막사에 있는 모든 여자 수용자들을 배신하는 일이다.
--- p.92

수용자들은 못이 박혀 있지 않은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슬쩍 가져오는 법을 알게 되었다. 식당의 양철 컵을, 장교들 막사에 버려져 있던 다리 하나가 부러진 작은 테이블을, 난로 위에서 지금도 쉬지 않고 끓고 있는 찌그러진 주전자를 슬쩍해 왔다. [...] 막사는 점점 아늑해지고 있다. [...] 시트 끝에서 뽑아낸 실로 만든 예쁜 도일리가 막사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실카는 계속해서 버려진 붕대를 모아 끓는 물에 빤 다음 자수팀에게 가져다주었다. 여자들이 머리에 두르는 머릿수건에도 가장자리를 따라 섬세한 자수가 놓이기 시작했다.
--- p.137

“내게 약을 계속 가져다주지 않으면 저기 있는 사람들에게 다 말해버릴 거야.”
그녀가 고개를 돌려 막사를 가리킨다. “네가 나치와 붙어먹었을 뿐 아니라 모피 코트를 입고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고 말이지. 거기다 동족 수천 명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거야.”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실카는 꽁꽁 얼어붙는다.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한나에게 설명하고 싶다. 나는 열여섯 살이었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어, 그 어떤 것도. 나는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야. 하지만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이 막사 동료들에게 얼마나 의미 없는 발악으로 들릴지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녀가 옆에 있는 것도 참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저주받은 악녀로 비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환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약을 한나를 위해 훔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인 친구들을 잃을 수도 없다.
--- p.158

올가는 바로 디자이너로 임명되어 여자들의 시트 끝을 살피며 30센티미터 정도 여유가 있는지 본다. 수를 놓게 된 수용자들은 새로 태어날 생명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며 흥분한다. 한나가 무리 뒤쪽에 앉아 혐오스럽다는 듯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어쨌기에 그렇게 다들 착각에 빠지는 거야?”
“한나.” 올가가 딱 잘라 말한다. “어둠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는 일은 잘못된 게 아니야.”
[...] 올가가 바늘땀을 풀며 단호하게 말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조시,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수용자들이 모두 함께 응원해주자 조시가 점점 더 크게 운다. “미안해.” 눈물로 목이 멘다. “정말 미안해. 난 못 하겠어.”
“아니, 넌 할 수 있어.” 실카가 힘주어 말한다. “할 수 있어. 꼭 해내야 해.”
“할 수 있어, 조시.” 엘레나의 말에 다른 수용자들도 그 말을 따라 하며 손을 뻗어 그녀를 보듬어준다.
“이제 조시는 괜찮을 거야. 각자 담요를 가져가서 좀 더 자. 내가 옆에 있을게.” 실카는 화가 나 어지러울 지경이지만 조시 옆에 웅크리고 누울 것이다. 조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것이다. 조시를 안아줄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모두들 고마워. 우리는 뭉쳐야 해. 우리에겐 우리가 전부야.”
--- pp.242-243

29번 막사 여자들이 그녀에게 남은 전부다. 그녀는 비르케나우에서 만난 랄레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그녀가 용감하다고 말했을까. 또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용감하다고 말했을까. [...] 그녀가 해야 할 용감한 일이 한 가지 더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실카!” 마르가레테가 달려와 그녀를 부둥켜안는다. “어떻게 된 일이야? 위험하잖아.”
실카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
--- pp.44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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