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는 영화 애호가들의 즐거운 수다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주제를 정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많은 대화가 그러하듯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지가 뻗어 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재미가 있습니다. 35년생 영화감독과 81년생 시네필의 영화 대화에 합석하신 걸 환영합니다.
--- p.7, 「들어가며」 중에서
그때는 연극 중간에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인 키노 드라마(Kino Drama)도 제법 있었어요.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1919)도 그런 식이었지요.
그럼 연극배우가 앞에서 연극을 하고, 그 뒷배경으로 영화가 나오는 건가요?
그게 아니고. 연극배우가 연극을 하다가 멈추고, 영화가 상영되는 거예요.
같은 배우가 연극에도, 영화에도 출연하는 건가요?
그렇지. 미리 연극배우가 출연해서 찍어놓은 필름인 거죠. 주로 야외장면. 그렇게 길지는 않고 10분 정도. 불을 끄고 영화를 상영했다가, 다시 불을 켜고 연극을 계속하는 거죠. 연극과 영화의 내용이 이어져요. 그런 연쇄극(連鎖劇) 말고도 당시 극장에서는 다양한 공연을 했어요.
--- p.16. 1막, 「영화를 보다-일제강점기와 6·25 전후의 영화관람」 중에서
옛날에 영화는 관제 검열을 했었는데, 평론가들이 쓰는 글에도 검열이 있었나요?
글에는 검열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딱 한 번 내가 유현목 감독님 대필로 쓴 글이 반공법에 걸려서 유 감독님이 계속 불려 다닌 적이 있어요. 원고 청탁을 많이 받았는데, 쓸 시간이 없었거든. 그래서 내가 대신 써준 글도 많았어요. 그 글도 그랬죠, 「왜 우리나라는 영화에서 인민군 제복을 제대로 안 입히고 영화를 찍느냐, 걔들 옷을 제대로 입혀야 현실감이 살아난다.’ 뭐 그런 내용이 반공법에 걸린 거지.
혹시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七人의 女捕虜)〉(1964)를 옹호한 「은막의 자유」라는 글 아닌가요? 그 글로 유현목 감독님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는 기사를 찾았는데요.
뉘앙스를 들어보니 내 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 저녁 소주 먹으면서 유 감독님이 “이거 무슨 뜻으로 썼냐?”고 나한테 물어보는 거라. 그래서 “이러이러한 거 아닙니까. 뭘 그리 걱정합니까?”라고 했어요. 나 때문에 그렇게 몇 번 불려 다녔는데 결국은 큰 문제가 아니니까 재판 과정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이만희 감독은 호되게 당했지만.
--- p.51. 2막, 「영화를 쓰다-반공법에 걸린 「은막의 자유」」 중에서
감독님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동료 여성 연출자는 없었나요?
동료는 아니고 위에 박남옥 감독이 있었어요. 유현목 감독님과 비슷한 연배로, 〈미망인〉(1955)으로 데뷔했지요. 하지만 남자 세계에 여자 혼자였고, 남자들이 대우도 잘 안 해주거든. 그러니까 이 양반이 동아출판사로 넘어간 거라. 뭐 때문인가 일 때문에 출판사에 가서 한 번 만났어요. 자존감이 있고 의젓한 스타일이었어요. 그분이 한국의 1대 여류 감독이에요. 그리고 2대는 홍은원 감독이 있어요. 이 사람은 나랑 친했지. 명동의 나일구 다방에서 자주 만났어요. 거기는 주로 영화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중견 영화인들이 아침부터 거기에 모여 한담을 나누고, 저녁에는 막걸리집에 갔지. 형편이 좀 괜찮은 사람은 몇 개 안 되던 바에 가서 술 마시고 그랬어요. 홍은원 씨는 조그마한 체구에 아주 활달하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p.81. 3막, 「영화를 만들다-한국의 여성 감독」 중에서
촬영장에서 식사는 어떻게 하셨나요? 요즘은 상업 영화를 찍을 때 이동식 밥차가 오던데요. 제가 단편영화를 연출할 때는 주로 김밥을 먹었어요.
촬영 중에는 그냥 배달시켜서 먹었어요.
짜장면 같은 거요?
아니. 그런 거 말고, 한식을 배달해주는 식당들이 있었어요. 주문하면 아주머니들이 머리에 이고 가지고 온다고. 안 그러면 근처 아무 식당에 가서 먹기도 했어요. 당시 촬영하면서 먹는 거는 잘 먹었어요.
식사 준비도 제작부장이 책임졌나요?
그렇지. 제작부장이 현장의 모든 것을 담당하니까, 어디서 촬영한다고 하면 미리 식당부터 정해 놓았어요. 모든 게 제작부장한테 달려있었지요. 촬영지를 헌팅할 때도 같이 가니까, 현지 식당 섭외도 그때 미리 해두었어요.
--- p.103. 3막, 「영화를 만들다-촬영 현장 분위기」 중에서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건 정치와 거리두기를 철저히 지켜왔다는 게 크게 한몫했다고 봐요. 이회창, 이명박을 비롯한 대통령 후보들이 영화제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영화제 측에서는 이들을 절대 무대에 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소개하는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보좌관들이 압력을 가했지만.
“나가서 마이크 한번 잡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건가요?
그렇지. 당시 영화제 관계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절대로 정치인들에게 마이크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은 끝까지 지켰어요. 하루는 이회창 후보가 남포동을 찾아서 보좌관들이 야외무대에 세워줄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사무국장이던 오석근이 앞을 가로막고 눈물을 글썽이며 만류해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어요.
--- p.167. 4막, 「영화도시 부산을 세우다-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비결과 〈다이빙벨〉 사태」 중에서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의 문화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부산, 한국, 아시아권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더 나아가야 해요. 이를 통해 영화 문화가 전파되고,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거지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 한류를 주도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2019년에 인상 깊게 본 아프가니스탄 여성 감독의 영화 〈하바, 마리암, 아예샤〉(2019) GV가 생각나요. 그때 사흐라 카리미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정말 감사하다며 말하기를, 아프간을 비롯한 주변 나라의 젊은 감독들이 아시아영화아카데미의 교육을 받고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들의 꿈이 이곳에 초청되는 것이라고요. 자신도 꼭 여기서 데뷔작을 선보이고 싶었다며, 그 목표를 이루었다고 감격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는 지금 아시아 영화인들의 꿈이자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 p.170. 4막, 「영화도시 부산을 세우다-부산 영화인의 보람과 부산 영화의 발전을 위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