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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를 개국한 손씨 가문은 조조처럼 후한 권력자의 자손도 아니고, 유비처럼 한나라 왕실의 피를 이어받지도 않았다. 손씨 가문은 당시 미개척지인 강동의 토착 호족 중 하나였다. 손권은 남방의 실력자요 토착 세력의 대부 격인 수성의 제왕으로 등거리 외교술이 탁월했으니, 위나라에는 고개를 숙여 전쟁을 막으려 했고 촉나라와는 동맹관계를 구축하여 위나라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비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208년에 시작된 유비와의 동맹에서 비롯되며 229년 그 맹약을 해체하기까지 대략 22년 동안 지속된다. 조조와 유비 역시 일류 정치가로서 그들이 내세운 외교 정책과 손권의 외교 전략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손권의 전략은 유비와의 연합전선을 통해 조조의 통일을 막는 데 중점이 있었으며, 먼저 삼국정립의 형세를 이루고 천하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것이었다. 오나라와 촉나라는 작은 나라였으므로 강대한 위나라에 대적하려면 철저히 인모人謨에 기대야 했기 때문이다.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은 조조가 하북 평정에 전념하는 사이에 강남을 손안에 넣고자 더욱 노력했다. 우선은 형 손책이 싸워서 얻은 지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며 내치에 힘썼다. 아울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인재 우선 정책을 취하여 장소, 주유周瑜, 노숙魯肅, 여몽, 정보程普 같은 쟁쟁한 인물들을 곁에 두었다.
아버지 손견이 유표의 부장인 황조黃祖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때는 동탁이 살해된 초평 3년(192)과 겹치고, 손책이 사망한 건안 5년(200)은 관도지전官渡之戰이 한창일 때이며, 손권의 강남 평정 또한 조조의 하북 평정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처럼 손씨 삼부자가 단시간에 강남의 드넓은 지역을 평정한 데는 본인의 능력 외에 외부 요인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241년에 황태자 손등孫登이 죽자, 새로운 황태자인 손화를 지지하는 세력과 손권의 총애를 받는 손패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격렬한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 사태는 결국 250년 손화의 폐위와 손패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252년에 손권이 세상을 떠나면서 신하들 간의 반목은 더욱 심해진다. 여기에 실력자로 떠오른 제갈각諸葛恪과 손준孫峻, 손침孫? 등이 전횡을 일삼으면서 나라가 기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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