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정의해 보려고 질문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불완전한 괴물’이라는 대답이 따라 붙었다. 나라는 존재는 파괴적으로 무능력해서, 자신을 망치는 식으로만 완전해지는 듯했다. 앞으로도 책에 쓰인 대로 망해 가겠지, 충동과 우울을 뭉쳐 공기놀이나 하며 살겠지 싶었다.
스티브 잡스나 에디슨도 ADHD라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폰이나 전구에 버금가는 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동등해진 느낌에 기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희망이 옅어질 때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싶었다. 작가가 한국의 미혼 여성 ADHD이고, 자기애로 가는 걸음마 중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없었다. 세상에는 ‘네가 무엇이든 소중하고 아름답다’라는 식의 낙관이 유행했지만 내게 적합한 안심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울던 사람은 쉽게 웃는 방법을 경계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난 괜찮지 않았고, 몇 년째 도망다니며 그저 삶을 유예하는 중이었다.
다른 ADHD들도 나처럼 새하얀 밤과 깜깜한 낮을 보내는지 궁금했다. 친근하고 정중하게 안부를 묻기 위하여, 일단 나의 이야기를 썼다. 모자란 글들을 초대장 삼아 전송할수 있다면, 나의 해묵은 패배감도 즐거운 파티의 호스트가 될 것이었다.
--- p.10~11
세상은 양쪽으로 봐야 좀 더 재미있는 곳이다. 자꾸 깜빡깜빡 잊고, 아주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는 내가 예전에는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망각이 신이 주신 선물이고, 나는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든 것 없이 가벼운 인생’은 관점을 바꾸자 ‘잊음으로써 가뿐해지는 인생’이 되었다. 나는 계속 사사로이 절망스럽겠지만,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기에 결국은 행복해질 것이다.
--- p.19
그 시절 내가 숨긴 장래 희망은 그냥 ‘사람’이었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모두가 정신이 없는’ 짱구 인생 말고, 훌륭하게 살지, 훌륭하지 않게 살지 결정권을 소유한 정제된 성년의 상태 말이다. ADHD 진단 후 엄청난 패배감에 휩싸인 데는, 이 미친 정신병이 내 10대를 홀랑 훔쳐 갔음을 아주 뒤늦게 깨달아 버린 이유도 컸다.
‘나쁘게 살았다’라는 후회는 미미해도, ‘나쁘지 않게 살 수도 있었다’라는 후회는 심각했다. 그것은 과거이자 현재였고 현실인데 환각이었다. 인생을 떳떳하지 않게 만든 수많은 실수들이 ADHD에서 기인했다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내 병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주변에 ADHD 아동이나 청소년이 있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아이들이 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자신을 깨닫고 나면, 그 애들은 스스로를 인생의 반환점으로 삼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몸만 자란 내가 결국은 혼돈을 극복하고 삶으로 나아갔듯이.
--- p.53~54
내 지인 중 한 명도 자신이 우울할 수 있다는 걸 꿈에도 몰라서 더 우울해져 갔다. 누군가는 자기가 부주의하다는 걸 의아하게 여기며 계속 부주의해졌다. 그들이 우울증인지 ADHD인지 내 수준의 지식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래오래 꾹꾹 참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사람이 경도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 내 치료 과정의 유일한 후회도 ‘내가 너무 늦었다’라는 사실이다. 내게도 심하게 병리적인 사람만 정신과에 가야 한다는 오해가 무심결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병원이란, 환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가 아니기 위해 다니는 곳이다. 언젠가 괜찮아질 미래를 위해 지금은 환자임을 받아들이려고 다니는 곳이다.
--- p.122~123
그리고 나는 의외로…… 복도에 얼룩진 껌 떼는 일을 좋아했다. 껌 떼기는 교무실 복도로 등교한 내가 반성문을 다 쓴 후 이행해야 하는 임무였다. 같이 징계를 받는 친구나 선배들은 죄다 그 일을 싫어했다. 착한 선생님은 고무장갑을 줬지만, 아닌 경우 맨손으로 수세미와 껌 칼, 퐁퐁을 다뤄야 했다. 더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손이 닿아 거룩할 정도로 깨끗해진 복도를 보면 삼모작에 성공한 농부처럼 즐거웠다.
비위 약하고 게으른 내가 왜 그런 걸 좋아했을까?
슬프게 짐작건대…… 껌 떼는 일은 내가 학교란 공간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작업이었던 것 같다. 다른 애들이 진로에 대한 가능성을 긁어모을 때 나는 씹다 뱉은 껌딱지나 모으며 위안을 챙긴 것이다. 내가 겪은 불이익은 대체로 내 잘못이지만, 이 지점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이 서글픈 기분이 된다.
가끔 ADHD란 존재하지도 않고, 약도 치료도 정신과의 상술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쭈그려 앉아 껌 떼던 순간이 떠오르곤 했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는 단체생활을 못 하던 내가, 자기혐오를 방패 삼던 10대의 내가 껌 대신 처방전을 뗐더라면 인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었다. 지금 여상히 삼켜 대는 알약이 그때도 주어졌더라면 나는 밖으로 나도는 대신 내 안으로 내달렸을지 모른다.
--- p.148
처음부터 완벽하게 가려는 욕심들은 결국 나를 무수한 완벽에서 추방시켰다. 허접스러움을 묵인할 때 실행력이 생기고, 스타트가 있어야 진행도 된다는 걸 배우고 있다.
만약 이 글을 보는 사람에게 ADHD가 있거나 다른 문제가 있어서 헤매는 중이라면, 본인의 능력이나 작업 과정보다 목표치를 바꿔 보는 건 어떨까 싶다. 그냥 완벽해지는 것보단 모자라다는 면에서 완벽해지는 게 훨씬 쉽다. 모자람은 꽤 괜찮은 친구다. 나를 거장으로 만들어 주진 못해도 거장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아마추어로는 만들어 주니 말이다.
---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