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게 하는 시간을 아시나요?
-- 김미정(sbbonzi@yes24.com)
알고는 있지만 어려운 어떤 개념을 여러 번 설명하다가 실패하자 드디어 상대는 이렇게 요구한다. "다섯 살 짜리 꼬마에게 말하듯 설명해봐"라고. 그럴 때 가장 좋은 표현법 하나를 권유하라면 단연코 '비유'를 가장 우위에 두겠다. 가령, 이런 경우도 말이다. 창가에 기대 앉아 책을 읽다가 그림자가 책장을 덮어 좀 어둡다 싶은 그 시간, 읽던 책을 그대로 펼쳐 놓은 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그 시간을 다섯 살 꼬마에게 전해야 하는 난감한 경우에도 비유의 언어는 마법을 타고 상대의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낮에서 밤으로 곧장 흐르던 옛날, '태양 왕'과 '밤의 여왕'만이 살던 그 때, 낮의 세상은 이글거리는 '태양의 왕'이 나타나면서부터 자기 색깔을 찾는 화려함으로 가득해지고, 컴컴한 어둠이 찾아오면 모든 것을 암흑으로 바꾸어 버리는 냉정한 얼굴의 '밤의 여왕' 이 지배하게 된다. 두 왕의 분명하고 팽배한 대립이 있던 시간 사이, 그 이분법적 세계를 흔들 '누군가'의 존재가 조용히 다가온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루의 시간이 그렇게 낮과 밤만을 곧장 흘러가지 않기에 조용히 나타난 그 존재는 낮과 밤 그 사이사이, 빡빡하게 도는 생존과 생활 사이에 놓인, 잔잔하고 고즈넉한 모양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부터가 세상의 꼬마들에게 전하는 안 에르보의 상상의 위력이 발휘되는 대목이다. 안 에르보는 그 상상력의 이름을 '파란 시간'이라 이름 짓는다.
어른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아이는 그것을 자기들의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언어로 바꾸어 이해한다. 이 '파란시간'은 아이 적의 가슴을 잃지 않은 작가가, 어른의 언어를 아이의 언어로 건너게 하는 상상력의 다리가 된다. 원제 '텅빈시간'(L' heure vide)이 말해주듯이 어른들이 말하는 텅 빈 그 시간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까지 안 에르보의 설명은 명쾌하기만 하다.
샛노란 태양 왕과 시커먼 밤의 여왕의 당당한 모습에 반해, 길고 마른 몸에 푸르스름한 외투를 걸친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파란 시간은 낮과 밤이 서로 으르렁 대며 싸우는 동안, 부드럽게 우리의 일상 안에 고인다. 해질녘에만 자리했던 파란 시간은 새벽공주를 사랑하게 되면서 새벽녘 즈음에도 자기 빛깔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또한 하얀 장미를 책 속에 끼워 넣은 덕분에 안개 낀 밤의 중간에서도 등장 한다. 혹은 책을 읽고 난 아이에게서도 그 파란 시간을 찾아볼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의 단단한 문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느라 방황하는, 누구에게 집중 받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을 알리려 하는 아이의 모습 안에서, 파랗고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자신을 보게 될 테고 그 아이의 영혼 안에 파란 흔적을 두고 가는 걸 잊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내 어린시절에도 이런 그림책이 있었다면 나는 꼭 시인이 되었을 텐데"라고 말하는 역자의 고백은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읽은 글귀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나는 그 반대야.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게 바로 이 시간이야.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도 나는 그 말이 좋아.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겐 맨날맨날 낯설어, 너무 사나워서 겁도 나구, 나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긴장해 봤댔자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기껏해야 잘난 척하는 게 고작이지. 그렇게 위협적인 세상도 도처에 잿빛 어둠이 고이기 시작하면서 만만하고 친숙해지는 거 있지. 얼마든지 화해하고 스며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세상으로 바뀌는 시간이 나는 좋아."
해질녘 그 시간은 울다가 잠에 잦아드는 아이처럼, 모든 것에 깃든 욕망이나의지 따위는 내려놓고 뭐든 잘 이해되고 그저 다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한 기분을 알게 해 준다. 일상의 빡빡함 뒤에 얇게 낀 엷은 미소처럼 말이다. 어느 해질녘, 파란 시간의 비밀을 간직한 채 혼자서 넉넉한 기분이 되어 배시시 웃고 있다가 마침 놀러 온 조카아이와 눈이 마주치게 되더라도 나는 근사한 대답하나를 할 수 있으리라. 또한 다섯 설 꼬마에게 이 '흐릿하고 포근한' 시간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 없이 멋진 선물 하나도 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