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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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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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마디

삶에 중독되어 있는 혹은 마비되어 있는 낮의 시간이 다 지고 또 한 번의 밤이 깊어질 때마다, 여행을 끝내고 막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차가운 물을 마시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반이고, 누군가 다정한 사람을 만나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반이다. 주저하는 마음이 반이고 무모한 마음이 반이다. 오늘과 내일이, 기억과 망각이, 희망과 절망이 반반씩 섞인 그런 시간은 흐릿하면서도 투명한, 비 내리는 밤하늘의 색깔을 닮았다. 마음이 풀려가고 조여지고, 사람이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생각이 달려가다 멈춘다. 그렇게 갈팡질팡이고 그렇게 단호한 시간이 밤 열한 시다. 우리가 만약 밤 열한 시에 함께 있다면, 그런데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서로의 맨마음을 이미 들여다본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쓰던 글이 잘 안 풀릴 때, 괜히 마음이 헛헛할 때,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비가 주룩주룩 올 때, 햇빛이 반짝반짝 빛날 때, 날이 어둑어둑 저물 때, 친구들이 룰루랄라 들이닥칠 때, 나는 요리를 한다.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고 고기를 재우고 파스타를 삶고 알록달록한 소스를 만든다. 집 안은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고 냉장고는 싱싱한 반찬들로 가득 차고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가득 찬다. 좋은 벗들과 좋은 음식을 나누는 일, 그것으로 이 생이 차고 넘친다.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거야. 세상에는 그런 소유도 있어. 잡을 수 없어도 볼 수 있는 것. 마찬가지로 볼 수 없어도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것도 있지. 이를테면 기억 같은 것.

어릴 때 내가 가지고 놀던 종이인형은 서울에서 전학 온, 얼굴이 하얗고 자그마하고 귀여운 아이가 그려준 것이었다. 나는 날마다 인형의 옷을 만들고 인형의 집을 짓고 인형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종이인형 위에 살며시 포개놓았던 내 꿈들은 구겨지고 더럽혀졌지만, 삶이 메말라갈수록 갈증은 깊어진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무엇, 두근두근 설레는 무엇, 기쁘고 수줍은 눈빛을 갖게 해줄 무엇이 간절해진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런 것을 사랑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의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동심을 길어올리는 일. 그것으로 나와 당신이 아이처럼 울고 웃는 일.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부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그림 같은 세상》, 《모두에게 해피엔딩》, 《초콜릿 우체국》, 《세븐틴》, 《그림 같은신화》, 《생각이 나서》, 《위로의 레시피》, 《눈을 감으면》, 《밤 열한 시》, 《반짝반짝 변주곡》, 《한입 코끼리》,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국경의 도서관》, 《아마도 아스파라거스》,《생각이 나서2》,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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