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테오도어 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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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테오도어 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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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독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 주로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4년간 알토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1837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학위를 받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관된 로마시대의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장래 연구방향의 큰 틀을 잡았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몇 년을 외국에서 머물다가 185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베를린 대학의 로마사 교수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863-66년, 1873-79년의 시기 동안 프러시아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비스마르크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유당과 사민당이 연정을 구성할 것을 충고하였다. 1879년 대학 동료가 유대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자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그의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 대출한 고문서들이 함께 재가 되었다. 1902년 로마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소수에 해당된다. 그는 1500여 개의 연구작업을 통해 로마사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마련했다. 그의 걸작은 1854년부터 56년까지 저술한 『로마사』 3권으로 이 책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카이사르의 통치를 19세기 말의 시기와 비교 해석하였다.

그는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소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스스로 기억할만한 업적으로는 '로마헌법'의 저술을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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