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허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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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허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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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마디

현대 사회에서 삶이 정치와 분리될 수 없어요. 빈민 선교를 하는 성직자가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죠. 정치에 무관심한 자들도 이미 정치적인 셈이에요. '정교분리'라는 허울로 교회의 침묵과 무관심을 바라는 정치권력에 동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죠.

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려고 지금까지 애써 왔어요. 그러나 제가 목사인 동안 완전히 하나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직을 버리고 노동자가 되었고 이제는 진짜 동네사람이지요. 사실 동네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데 저 혼자 이름난 목사가 된 것이 양심의 가책이 됐고 이 썩어가는 세상을 살리는 길은 '자리 앉은 사람의 각성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죠.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아가 성장하도록 도왔는데 결국 도시 사람이 상업화와 산업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아를 성취하는 목표가 거대한 도시 산업구조라는 기계의 부속품이 될 수 밖에 없기에 의미를 느끼지 못해 생태적 자리인 농촌으로 내려왔다.

1941년 김해에서 가난한 민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의 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해 1969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벽돌 쌓는 일과 대학 구내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노력한 그는 군목(軍牧) 시절 청계천에서 빈민들을 만났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빈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76년 가난한 주민들과 함께 하월곡동 산동네에 동월교회를 개척하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일하고, 국악 찬송 등 한국적 예배와 민중적 신앙고백을 몸으로 실천했다. 또한 1981년 한국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으면서 민중교육론을 연구하여 『스스로 말하게 하라』(1987) 등을 저술하는 등 교육이론을 현장에서 실천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업으로 삼던 그는 민주화 운동과 교목생활을 병행하였다. 여러차례 취조, 구금을 당하고 도피생활도 하였다. 87년 재야가 분열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운동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의 삶에 함께 하는 것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1990년 마지막 기득권이던 목사직을 버리고 1994년까지 미장공이 되어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월곡동 건축일꾼 두레’를 만들어 건설노동자 생산협동공동체를 시도했다.

그러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소비의 근원지인 도시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나눔과 섬김, 공생의 가치가 담긴 생태적 관점으로 세계관이 확대되자, 1996년 4월 무주로 귀농하여 땅을 일구며 생태·생명운동에 뜻을 두었다. 그리고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대안학교인 무주 푸른꿈 고등학교 설립추진위원장으로서 대안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며, 2005년부터 온 배움터(전 녹색대학교) 대표를 맡으며 생태·생명운동과 교육에 헌신해 왔다.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벗하고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지향하며 빈민운동과 생태·생명운동 그리고 민중교육운동을 몸으로 실천해 왔다. 최근에는 자신의 전 재산인 땅과 집을 자연 생태 보존을 위해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증했다. 그러나 현재는 부인과 함께 의식불명의 뇌병증으로 투병 중에 있다.

그의 대표저서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한국적 민중교육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이후 민중교육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외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판?사랑판』(1992), 『허병섭 이정진의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2001)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한국민중교육론』(198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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