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마디
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삶과 시에 대한 이 미더움을 버리지 않고 천천히 익어가고 싶다.
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안으로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고는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침묵의 순연한 재가 아니었다. 끝내 절규도 침묵도 되지 못한 언어들을 여기 묶는다. 이 잔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소음 속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언제부턴가 내 눈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다.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삶의 깊이를 헤아리고 담아내는 일이란 결국 그것의 비참함과 쓸쓸함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걸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비참함과 쓸쓸함이 또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면, 느릿느릿, 그러나 쉬임없이 그리로 갈 것이다. 매순간 환절기와도 같을 세월 속으로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