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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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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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1961년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문화공보부 기획실장을 비롯하여 문화정책을 조정하는 생활이 주를 이루었고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는 ‘영화’를 보는 평범한 관객이었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해외의 영화를 모아 상영회를 가졌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해외영화제를 다니며 한국영화 홍보에도 힘을 썼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지도 않았지만 이 시절부터 그의 삶에 영화가 함께하기 시작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4년을 일했다. 이후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닐 조던의 '크라잉게임'이 검열 없이 개봉되게 했고 구소련의 영화를 해금시켰다. 영화에 대한 사전검열이 강하던 시절에 많은 영화들이 햇빛을 보기 시작했다.

199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석이 되는 만남이 시작되었다. 국제영화제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었다. 칸을 비롯한 국제영화제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범을 알렸다. 모두가 말렸다. 아무도 미래를 장담하지 않던 해였다. 1996년 제1회 영화제를 시작으로 영화제는 점점 커지면서 다양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세계 곳곳의 다양한 영화제를 찾아다녔고 수많은 영화인을 만났다. 작품을 만드는 감독들, 영화 축제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사람들, 자원봉사자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모여드는 관객들, 모두가 그의 벗이었다. ‘미스터 킴’은 어느새 국제영화제의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아무도 그를 ‘동호’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국에는 무수한 김씨들이 있지만 국제영화제와 세계영화계에서 그는 ‘킴’이 되었다. 베를린과 칸의 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밤을 알리는 파티가 열리면 언제나 행사장에 한 시간 일찍 도착해 파티장의 문을 지킨다. 지난 15년간 그는 한국영화 앞에 서 있는 한결같은 문지기이자 세계영화로 들어가려고 하는 시골사람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이면 그의 일정은 항상 30분 간격을 두고 빼곡히 짜여 있었다. 49년간 기록을 쉬지 않았던 수첩에는 미래를 약속하는 갖가지 일정이 지금도 빼곡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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