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구니키다 돗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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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구니키다 돗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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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ppo Kunikida,くにきだ どっぽ,國木田 獨步
일본 근대의 소설가이자 시인, 저널리스트, 편집자다. 치바 현(千葉縣) 출생으로 히로시마 현(廣島縣)과 야마구치 현(山口縣) 등에서 성장했다. 아명은 가메키치(龜吉)인데 데쓰오(哲夫)로 개명했다. 돗포(獨步)는 필명이며, 학력은 도쿄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 현 와세다(早稻田)대학] 영어정치과를 중퇴했다.

작가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등과 친교를 맺었고, 데뷔작은 청일 전쟁 종군기인 『애제통신(愛弟通信)』(1894)이다. 대표 작품으로 자연 친화적인 시 「돗포 읊다(獨步吟)」(1897) 등과 사상 소설 「잊을 수 없는 사람들(忘れ得ぬ人人)」(1898), 「쇠고기와 감자(牛肉と馬鈴薯)」(1901), 자연을 재발견한 명문 「무사시노(武藏野)」(1898) 등을 발표하고, 후기에 「봄 새(春の鳥)」(1904), 「대나무 쪽문(竹の木戶)」(1908)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맡는다. 잡지 『부인화화보(婦人畵報)』(현존)의 창간자, 편집자로서도 평가받고 있다. 작가 후반기에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이 돗포 작품을 높이 평가했고,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선구자 이광수는 1900년대 초 도쿄 유학 시절 돗포의 단편을 애독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893년부터 일기 『거짓 없는 기록(欺かざるの記)』을 쓰기 시작해 사후에 출판된다.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의 지인이자 개화기 작가인 야노 류케이(矢野龍溪)에게 소개받아 오이타 현(大分縣) 사이키(佐伯) 소재 쓰루야학관(鶴谷學館)의 영어 및 수학 교사로 부임(1893. 10), 이듬해 8개월 만에 퇴직한다.
1894년, 『청년문학(靑年文學)』에 참가, 출판사 민우사(民友社)에 입사해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1890년에 창간한 『국민신문(國民新聞)』의 기자가 된다. 1894년 청일 전쟁 해군 종군 기자로 참가해, 남동생에게 부치는 서간체 형식으로 전쟁 르포 『애제통신(愛弟通信)』을 연재해 ‘국민신문 기자 구니키다 테쓰오(國木田哲夫)’로서 일약 유명해진다.

귀국 후 1895년 11월, 기독교인 집안의 사사키 노부코(佐佐城信子)와 만나 열애 끝에 도쿠토미 소호의 주례로 결혼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곤궁한 생활 때문에 귀향해 부모와 동거하게 되는데 이듬해 노부코(信子)가 실종되어 협의 이혼하고, 그 충격으로 실의에 빠진다. 나중에 이를 소재로 시라카바(白樺)파 작가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는 소설 『어떤 여자(或女る)』(1919)를 발표했다.
1905년 건강이 악화된다. 제2소설집 『돗포집(獨步集)』(1905)을 간행하고, 단편 「호외」(1906)를 발표, 폐결핵으로 요양 생활 중, 「궁사(窮死)」 「절조(節操)」(1907) 등을 발표하고 37세에 작고한다. 자연주의 작가 다야마 가타이는 조사에서, 돗포의 인생은 한마디로 ‘궁(窮)’이라고 했다. 제3소설집 『운명(運命)』(1906)이 높게 평가받았고, 돗포는 자연주의 운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돗포의 문학과 사상은 명리(名利) 부정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장(老壯) 사상,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의 자연 계절 묘사, 영국의 전원시인 워즈워스의 낭만성, 기독교의 박애(博愛)정신 등의 영향을 받았다. 이 외에도 무사시노(武?野)의 자연미를 시적인 요소로 함축한 『무사시노』, 사교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통해 돗포의 사상을 말하는 『쇠고기와 감자(牛肉と馬鈴薯)』,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임을 모르고 결혼한 남성의 고뇌를 다룬 『운명론자(運命論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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