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 이극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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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克堪
이극감(李克堪)의 자는 덕여(德輿)이고, 호는 이봉(二峰)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둔촌선생(遁村先生) 이집(李集)의 증손으로, 우의정을 지낸 충희공 인손(忠僖公 仁孫)의 둘째아들이며, 영의정 광릉부원군 극배(廣陵府院君 克培)의 아우이다. 당시에 그의 집안은 5형제와 이들의 아들들 9명이 문과에 급제하고 조정에 출사하여, 성종대(成宗代)에는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조선조 전기 최고의 가문이었다. 그는 18세에 문과에 급제(及第)하여, 21세에 중시(重試)에 또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서 지제교(知製敎)와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겸하였다. 30세에 이조참의(吏曹參議), 34세에 도승지(都承旨)에 이어, 곧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오르고, 36세에 팔좌(八座)의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학문(學問)이 고명(高名)하고, 문장(文章)과 풍절(風節)이 용동(聳動)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 『전대여훈(前代女訓)』,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찬술(撰述)하고, 『치평요람(治平要覽)』, 『의방유취(醫方類聚)』등을 편수(編修)·교정(校正)간행하였으며, 『어제훈사발(御製訓辭跋)』, 『북정록(北征錄)』등 제편(諸篇)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외에도 손수 지은 시문(詩文)을 포함한, 많은 글들이 전해왔을 터이지만,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어서(御書)와 저서(著書)를 모두 몰수당하였으며, 그 후에도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이 보관되지 못하고, 소실(消失)되어 전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행한 업적과, 지은 시문(詩文)들이 각 실록, 여지승람, 동문선, 용재총화, 연려실기술, 명인시선 등 사기(史記)에 나타나는 게 있어, 이를 모아 1969년 후손들이 이봉선생유고(二峯先生遺稿)를 간행하였다.
이극감은 대의(大意)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의(節義)가 솟구치고, 기량(器量)이 홍대(弘大)하며,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세인(世人)들이 그를 대(對)함에 “경세제민의 국사(經世濟民之國士)”라 칭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부터 세자보도(世子輔導)의 책임을 겸하였는데, 이는 병(病)으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세조는 그에게 세자의 교육을 맡기면서 “내가 세자(世子)를 너에게 부탁하니, 네가 능히 잘 보필(輔弼)하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하며 “경은 세자(世子)의 스승이라 내가 믿고 중히 여기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병으로 향년 42세에 졸(卒)하였으며,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으로 광성군(廣城君)에 훈봉되고, 문경공(文景公)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중종반정 후 의정부 좌의정의 증직을 받았다.
이극감은 대의(大意)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의(節義)가 솟구치고, 기량(器量)이 홍대(弘大)하며,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세인(世人)들이 그를 대(對)함에 “경세제민의 국사(經世濟民之國士)”라 칭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부터 세자보도(世子輔導)의 책임을 겸하였는데, 이는 병(病)으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세조는 그에게 세자의 교육을 맡기면서 “내가 세자(世子)를 너에게 부탁하니, 네가 능히 잘 보필(輔弼)하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하며 “경은 세자(世子)의 스승이라 내가 믿고 중히 여기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병으로 향년 42세에 졸(卒)하였으며,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으로 광성군(廣城君)에 훈봉되고, 문경공(文景公)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중종반정 후 의정부 좌의정의 증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