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홍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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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홍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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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汝河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본관이 부림[(缶林, 부계(缶溪)]이며 부림 홍씨 15세다. 부림은 곧 그의 선향인데, 지금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일대다. 시조는 고려 중엽 때 재상을 지낸 난(鸞)이고, 1세가 직장을 지맨 좌(佐)이며 5세 인석(仁?)과 6세 문영(文永) 때 상주로 이거하고 다시 8세 득우(得禹) 때 함창으로 이거했는데, 5세 인석 이후를 함창파라 부른다. 성종과 연산군 때 양대(兩代) 홍문관 대제학 곧 문형(文衡)을 지낸 홍귀달은 홍여하의 5대조가 된다. 그리고 인조 때 대사헌을 지낸 홍호의 아들이 홍여하다. 홍호는 정경세의 제자로 퇴계에서 유성룡, 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맥의 위치에 있었다.
홍여하는 자가 백원, 호가 목재와 산택재다. 안동부 성동리, 즉 지금의 문경시 영순면 율리에서 홍호와 장흥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모친 고씨의 상을, 27세 때 부친상을 당했다. 35세 때 생원진사시와 식년 문과에 합격했다. 37세 봉교로 있을 때 송규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상진과 이원정을 추천한 일로 파직되었다. 다시 그해 응지 상소를 올렸다가 고상도 찰방으로 쫓겨났으며, 40세 경성 판관으로 있을 때 현종이 즉위해 응지 상소를 올렸는데, 북방 군정의 폐단과 함께 이후원에 대해 붕당의 행태가 심함을 지적하자 이조 판서로 있던 송시열이 이것은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여겨 상소한 뒤 사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서인 측에서 이 상소가 윤휴 등이 조종한 것이라고 보아 크게 문제를 삼으면서, 그는 당쟁 속에 휘말려 들었다. 이때에는 제1차 예송이 터지기도 했다. 41세 때 병마사 권우의 일을 다시 문제 삼았다가 파직된 뒤에 충청도 황간으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후 풀려나 고향 함창 율리로 돌아왔다.
율리로 돌아온 후 그는 산택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매진했다. 51세 때 예천 북쪽 복천촌에 존성재를 짓고 잠시 이거했다가 53세 때 다시 율리로 돌아왔다. 55세 때 숙종이 즉위해 병조 정랑과 사간의 관직을 내렸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예천의 흑송리에 장사 지냈으며, 이장 후 묘갈은 계당 유주목이 지었다. 1689년 갈암 이현일의 주청으로 통정대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693년 근암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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