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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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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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殷相,
이은상(李殷相, 1617∼1678)은 황해도 연안(延安)을 본관으로 하며,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다. 1617년에 부친 이소한(李昭漢, 1598∼1645)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던 조부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조선 중기 한문학 4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외조부 이상의(李尙毅, 1560∼1624)는 1613년 위성공신(衛聖功臣) 3등에 녹훈된 바 있다. 또한 이은상을 포함한 집안 형제 대다수가 과거 급제 후 관계 요직으로 진출하는 등, 집안 전체가 학문에 힘쓰는 가풍으로 명망이 높았다. 연안 이씨 가문은 고려 말까지 안변(安邊)에서 가세를 키우다가 조선 건국 이후 오늘날의 서울로 옮겨 왔다. 본가 터전은 성균관의 서남쪽,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로, 당시 지명으로는 관동(館洞)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중한 성품이었다고 전하는 이은상은 한문학에 조예가 뛰어난 조부 이정구로부터 글을 배웠다. 16세경부터 수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많은 이들이 애석해했다. 하지만 그는 의기소침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해 1651년(효종 2)에 34세의 나이로 문과 을과에 급제했다. 설서(說書)로 있다가 1656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했고, 1659년에 월과제에 세 차례 장원한 실력을 인정받아 1660년 교리(校理)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1663년에 승지, 1666년에 대사간, 1668년에 도승지, 1674년에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 외에도 호조참판, 예조참판, 병조참판, 공조참판 등 제조(諸曹)를 두루 거쳤다. 또한 호남과 관서의 시험관을 담당했고, 외직으로 안변부사(安邊府使)와 여주목사(驪州牧師)에 제수되었으나 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부임하지 않았다.
1674년에 현종(顯宗)이 세상을 뜨자 애책문(哀冊文)을 찬진하는 중요 임무를 맡았다. 이는 이은상이 문신으로서 가진 뛰어난 필력을 관계에서 인정받았음을 보여 준다. 이은상은 또한 시사(詩詞)에도 능해 다수의 작품을 지었다. 현재 총 1059수가 그의 문집인 ≪동리집(東里集)≫에 전한다.
문신으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소탈한 성품을 바탕으로 이은상은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특히 효종(1649∼1659 재위)과 현종(1659∼1674 재위)에게 측근으로 인정받으며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은상은 평소 소탈한 성품이면서 임금에게도 할 말은 하는 강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의 후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이해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별세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가 재차 불거지면서 남인이 득세하고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실각했다. 남인 세력에 패배한 송시열이 결국 덕원, 거제 등지로 유배를 떠나자, 이은상은 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병을 핑계로 조회에 불참하다가 휴가를 청해 관동으로 들어갔고, 결국 관직에 정식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1678년에 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은상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신도비에 몇 가지 전한다. 이은상은 부모를 일찍 여읜 것을 항상 애통해했으며 그들에 대해 말할 때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었다. 제사는 풍족하고 깨끗하게 하도록 힘썼고 나이가 들어서도 친히 직접 모셨다. 또한 먼저 죽은 사촌 아우 둘의 장성한 딸들이 혼인하지 못하자 적극적으로 나서 혼사를 성취시켰다. 병자호란 때 고아가 된 어린 조카딸은 데려다 애지중지 키웠는데, 남들은 그녀가 친자식이 아님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누이가 나병으로 고통 받자 당시 이은상은 60세의 고령임에도 몸소 약을 구해 누이를 돌보았으며 훗날 친히 염습했다. 정이 많고 따뜻한 인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은상의 처 밀양 박씨는 동부승지 박안제(朴安悌, 1590∼1663)의 딸로, 부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이윤조(李潤朝)는 과거 급제 후 사관(史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딸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에게 출가했다. 김만중은 예조판서, 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많은 시문과 잡록,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의 소설을 남긴 한국 문학사의 주요 인물이다. 이은상은 일찍이 사위 김만중의 문학적 소양을 알아보고 임종 시 다른 가족들은 물러나게 하고 유문(遺文)을 그에게 맡겼다. 김만중은 이은상의 유고를 산정(刪定)한 뒤 아들 김진화(金鎭華)에게 전했다. 1702년, 이은상의 외손 김진화는 ≪동리집≫을 간행했다.
이은상은 5년 전 사별한 아내 박씨 묘 우측에 합장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 150-7로, 이곳에 조성된 부친 이소한과 이은상, 이유상 형제의 묘역에는 이 세 사람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은상의 신도비는 그 아내 박씨의 생전 부탁대로 종질 이희조(李喜朝, 1655∼1724)가 연보와 행록을 편술하자, 이를 토대로 이이명(李?命, 1658∼1722)이 비문을 짓고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글씨를 썼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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