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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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최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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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嘉運, 고죽孤竹
1539년,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자는 가운(嘉運)이고 호는 고죽(孤竹)이니,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수인(守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광훈과 함께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에게 글을 배웠다.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도 드나들었다. 진사에 합격하였을 무렵에 율곡 이이ㆍ구봉 송익필ㆍ동고 최립 등의 시인들과 무이동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놀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팔문장(八文章)이라고 불렀다. 또 송강 정철ㆍ만죽 서익 등의 명사들과 삼청동에 모여 놀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십팔숙(二十八宿)이라고 불렀다.

문과에 급제했고, 북도평사(北道評事, 정6품)에 임명되어 군막에 부임하였다. 여기서 홍랑(洪娘)이라는 기생을 사랑했는데, 군막 안에까지 따라다녔다. 봄에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홍랑이 쌍성까지 따라와서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함관령에 이르자, 날은 저물고 비가 어둡게 내렸다. 홍랑이 노래 한 장을 지어서 최경창에게 보내고는, 소식이 서로 끊어졌다.

1575년, 최경창의 병이 깊어졌다. 봄부터 겨울까지 침상과 이불을 떠나지 못하였다. 홍랑이 그 소식을 듣고는 그날로 길을 떠났는데, 일곱 날 밤낮이 걸려서야 서울에 이르렀다. 그때에는 양계(兩界) 사람들의 서울 출입을 금한 데다 마침 인순대비의 국상을 만났으므로, 비록 국상이 지나가긴 했지만 평상시와 같지 않았기에, 이들의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최경창은 벼슬을 내어놓았고, 이듬해 여름에 홍랑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전라도 영광 군수(종4품)로 부임하였다가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뒤로도 대동찰방(종6품)을 거쳐 종성부사(종3품)가 되었지만, 품계를 뛰어넘은 임명과 참소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최경창이 당시에 재상이었던 이산해와 처음에는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의 마음이 공평치 못한 것을 알고는 교유를 끊었다. 그래서 바깥 고을로만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삼당시인이 남원에서 광한루 시회로 모이고 대동강에서 부벽루 시회로 모였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봉은사에서 모여 시를 지으며 놀았다. 1583년,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어 서울고 올라오다가, 경성 객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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