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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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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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容萬
1909년 서울에서 부친이 영어 교사인 집안에서 태어난다. 일찍이 영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한 뒤 1930년 『비판』에 「사랑과 행랑」을 발표하고 같은 해 『동광』에 희곡 「가보세」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이후 희곡 작가와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1933년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표방했던 ‘구인회’를 조직해 활동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했으며 1931년 『매일신보』의 학예부 기자로 입사해 활동한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대표적인 친일 언론이었으며, 1945년 해방 무렵에는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을 지내고 있었을 정도로 오래 근무했다. 특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친일 문학인들이 결성한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기고 활동에 참여하며, 대표적 친일 문학잡지인 『국민문학』에 일본어로 쓴 희곡 「광산의 밤(鑛山の夜)」(1944) 등을 발표하는 등 일제 말기에 지속적인 친일 창작 활동을 병행한다. 해방 이후에는 영자 신문인 『코리아타임스』의 주필과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종전 무렵인 1953년부터 20년 동안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의 교수로 재직한다. 한국전쟁 직전에 첫 창작집을 내기 위해 원고를 인쇄소에 맡겼으나 이 원고가 전쟁 중 소실되었다는 일화가 있으며, 이 사건과 함께 절친하던 구인회 시절의 동료들인 정지용, 박태원, 이태준이 전쟁 중 월북한 이후로는 창작 활동에 소극적으로 임한다. 반면에 이상, 정지용, 염상섭 등 근대 문학사의 유명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자전 소설인 『구인회 만들 무렵』 등과 다수의 번역 작품들을 남긴다. 그는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주로 쓴 것으로 평가받는다. 단편집에 『북경의 기억』, 『만찬』, 『고향에 돌아와도』, 수필집에 『세월의 너울을 벗고』, 번역에 『두시선역(杜詩選譯)』, 『인간의 굴레』, 『포 단편소설』, 기타 저서에 『문학개론』, 『육당 최남선』, 『일제하의 문화운동사』 등이 있다. 2002년 공개된 친일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2년까지 밝혀진 친일 작품 수는 소설 3편과 기타 기고문 5편 등 총 8편이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 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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