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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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하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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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은 1870년 진주(晋州)의 사곡리(士谷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적전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1864∼1919)의 고제(高弟)이며, 남명이 ‘설중한매(雪中寒梅)’라고 기상을 격찬했던 각재(覺齋) 하항(河沆, 1538∼1590)의 문인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1553∼1612)의 11대손이다. 학맥으로는 퇴계의 학풍을 계승한 고제이며, 가학으로는 남명의 학풍을 계승한 적전이라는 점은 회봉의 학문적 성격과 위상을 대변한다.
그는 조선과 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한 다음 해인 1946년까지 역사상 가장 큰 격변기를 유학자, 독립운동가, 문학가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의 생은 낙수재(落水齋)에서 보낸 학문 수학기(1870∼1917)와 귀강 정사(龜岡精舍)에서 보낸 애국 계몽기(1917∼1930), 덕곡 서당(德谷書堂)에서 보낸 창작 저술기(1931∼1946)로 나눌 수 있다.
학문 수학기에는 낙수재를 중심으로 향리의 동학(同學) 및 집안의 자제들과 함께 학업에 매진하고, 1896년 27세 되는 해인 가을에 거창의 다전(茶田)에서 면우를 알현하고 사사했으며, 후산(后山) 허유(許愈, 1833∼1904),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1845∼1908),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1847∼1916),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 1870∼1952)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했다.
귀강 정사에서의 애국 계몽기에는 1919년 파리 장서에 서명해 진주와 성주를 오가며 옥중 생활을 했고, 1921년에는 <국성론>을 지어 유학의 가치인 ‘예의(禮義)’를 ‘국시(國是)’로 국민 의식을 고취했다. 1926년에는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하고자 국내에 잠입한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을 도운 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29년에는 을지문덕·김유신·강감찬·이순신을 대상으로 <명장열전(名將列傳)>, 남이(南怡)와 김덕령(金德齡)을 대상으로 <용장열전(勇將列傳)>을 지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덕곡 서당의 창작 저술기에는 1934년 <화도시> 120수를 완성하고, 다시 1937년 <수미음> 134수를 완성했다. <화도시>는 망국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갈등과 고뇌의 산물로, 소동파가 그랬던 것처럼 도연명의 시에 모두 화운함으로써 자신의 시재(詩才)도 나타내고, 격변 속에서도 꼿꼿한 절개를 지켜 갈 것임을 밝힌 시다. 그는 또 우리나라 시화사(詩話史)의 마지막 비평집인 ≪동시화(東詩話)≫를 저술했고, 1943년에는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학안인 ≪동유학안(東儒學案)≫을 저술했다. 1945년 8월 노쇠해진 몸으로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고, 다음 해인 1946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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