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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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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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商在,월남(月南)
개항기 때, 중추원1등의관, 내각총무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국권 피탈 이후 YMCA 전국연합회회장으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끈 관료 · 개신교인 · 독립운동가.
1850~1927. 충남 서천 출생. 본명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안종수, 고영희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다녀옴. 1887년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됨.
1894년 갑오개혁 후 학무아문참의를 지냈고, 그 뒤 내각총서 및 중추원 1등의관 등을 지냄. 1896년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고, 1898년 만민공동회를 개최함.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과 3년 동안 복역함. 1923년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3월 29일 병으로 별세함. 1927년 4월 7일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

유저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진평화(眞平和)』·『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청년회문답』과 『상정부서(上政府書)』 제1·2,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등 다수가 있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사망한 해인 1927년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신도비(神道碑)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 지었으며, 묘비(墓碑)의 비문은 변영로(卞榮魯)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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