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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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이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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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규는 일제시대에는 중등학교 교사로서의 교육실천가, 교장으로서의 교육행정가였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교육학을 극복한 자주적 교육사가, 새 국가 건설의 기초를 놓은 통일운동가였다. 1888년 강원 원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의 경성의학강습소에서 5년간 공부했고 외과의사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민족적 사명을 자각하면서 의사의 길을 접고 교사의 길에 들어섰다. 개성 송도보통학교와 서울 배화여자중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반일애국사상을 교육하였다. 민족주의자 중심의 실력양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사건(1938년)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 동안 『조선 교육사』의 집필 구상을 했다. 1929년 설립된 조선어학회원, 위원장을 맡아 국어 철자법을 통일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하였고, 이 일로 33인이 연루된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으로 감옥에 갇힌다. 1946년 6월 배화고등여학교의 교장직을 그만둘 때까지 교직생활을 했다. 일제치하에서 이만규는 총 2년간의 옥중생활을 하였고, 2년 7개월간의 해직교사 생활을 했다. 이 해직 기간에 『조선교육사』를 저술하게 된다. 이만규의 교육실천과 교육사상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몽양 여운형 그리고 민족주의자 한서 남궁억과 남강 이승훈이었다. 『조선교육사』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뒤의 두 사람은 후세가 추앙해야 할 인물로 선정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와 근로인민당에 참여하여 교육과 문화 부문에 관한 강령과 정책을 수립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고, 5·10총선거 등 정치적인 변화로 인하여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 근로인 민당 대표로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북한에 갔다가 남는다. 북한에서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교육성 산하 보통학교국장을 역임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거쳐 ‘민주조선’ 의 사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1978년 세상을 떠났다 고 한다. 민족·민중에 기초한 『조선교육사』는 해방 후 한국 교육이 지향 할 방향을 찾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문화사 학, 민족사학, 사회경제사학이라는 3차원성이 어우러진 이만규의 교육사학이 근저를 이루는 『조선교육사』는 남북한 교육 사학사에서 ‘원조’ 또는 ‘고전’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국내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한국 교육사 개설서에는 『조선교육사』를 인용하지 않는 것이 아예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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