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광명

이전

  저 : 이광명
관심작가 알림신청
李匡明
호가 해악장인(海嶽丈人)이며, 숙종 27년(1701)에 서울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에서 태어나 정조 2년(1778) 함경도 갑산 유배지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친은 소론인 이진유(李眞儒)의 막냇동생인 이진위(李眞偉, 1681∼1710)이고 모친은 송병원(宋炳遠)의 딸 은진 송씨(恩津宋氏)다. 그가 10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강화도(江華島) 사기리(沙器里)에서 장사 지내고 그곳에서 복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건창(李建昌) 대까지 250여 년 동안 그의 가문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또한 이광명이 강화도에 살게 된 것은 당쟁의 결과였다. 그의 백부 이진유는 소론으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의 거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가 영조 등극 이후 노론이 정권을 재탈환하자 그는 추자도로 유배를 가게 되어 그곳에서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을 지었다. 몇 년 후 이진유는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鞠問) 중 장폐(杖斃)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진유 일가는 정계에서 멀어지게 되고, 종질(從姪)이던 이광명은 어려서 편모와 함께 강화도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이광명은 강화도에서 모친의 훈육을 받았으며 강화도 진강(鎭江)에 있던 정제두(鄭齊斗)에게 사사(師事)했다. 우리나라 양명학(陽明學)은 정제두에 이르러 학문 체계가 정리되어 성장하게 되는데 그 근거지가 강화도였다. 정제두가 강화로 간 것은 1709년이고 이광명이 그곳에 이주한 해는 1710년으로, 자연스럽게 이광명은 정제두로부터 양명학을 수학했고 그의 손서(孫壻)가 되어 이후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조선의 양명학이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광명은 성리학 중심의 조선 유학과 대립되는 양명학을 수용해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이광명이 55세 되던 1755년에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이 일어나, 신임사화 때 노론 대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가 영조 등극 후에 죽임을 당한 이진유에게 역률이 추시되자[을해옥사(乙亥獄事)], 이광명도 연좌율에 따라 갑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24년을 살다가 78세에 삶을 마감했다.

이광명의 대표 상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