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창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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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김창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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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翕
1653(효종4)~1722(경종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낙송자(洛誦子)?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6남 중 3남으로 태어났으며 위로 영의정을 지낸 노론(老論)의 영수 김창집(金昌集), 학문과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김창협(金昌協)을 형으로 두었다. 아우 김창업(金昌業)?김창즙(金昌緝)?김창립(金昌立) 등도 모두 당대에 명성이 있었다. 이단상(李端相), 조성기(趙聖期) 등에게 수학하였으며, 21세(1673, 현종1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숙종대의 환국정치(換局政治)로 부친이 유배와 사사를 당하자 출사에 완전히 뜻을 접고 양주의 벽계(檗溪)와 설악산 등지를 오가며 은거의 삶을 살았다.
형 김창협과 더불어 학문과 시문으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고 당대 학자와 문인들은 물론 후대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기호 학단(畿湖學團)에 깊은 궤적을 남겼다. 노론의 명문가로 소론(少論) 및 중인(中人)들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불가의 승려들과도 교유하였다. 문학적으로는 《시경(詩經)》과 한위악부(漢魏樂府), 《문선(文選)》과 《장자(莊子)》 및 불전(佛典)과 소품문(小品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두루 궁구하여, 형식과 격례(格例)에 얽매이는 구태의연한 문학적 관습을 배격하고 실상을 문학 속에 참되게 담아내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실험과 성과는 후대 조선 문단의 다양성에 풍부한 토양이 되었다. 학문적으로는 낙학(洛學)의 종주인 형 김창협의 학문적 특성과 대체적인 궤를 같이하되 세밀하고 구체적인 각론에 있어서는 면밀한 검토와 주장, 그리고 다양한 학자들과의 토론을 전개하며 자신만의 학문관을 구축하면서 역시 낙학의 종주로 자리매김하였다. 벼슬에 나아가 실제 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적은 없으나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재야에서 학문과 문학 양방면 모두 뚜렷하고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대의 거두가 된 문인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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