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진형

이전

  저 : 주진형
관심작가 알림신청
朱震亨
원(元)나라 세조(世祖) 때인 서기 1281년 음력 11월 28일에 무주(?州)의 금화부(金華府)의 의오현(義烏縣)에서 출생하였으니 자(字)는 언수(彦脩)이다. 나중에 선생에게 배우던 사람들이 선생을 높여서 단계옹(丹溪翁)이라 불렀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주단계(朱丹溪) 또는 단계선생(丹溪先生)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었다. 단계선생(丹溪先生)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밝고 활달하였으며, 글을 읽을 때 곧바로 대의(大義)를 깨우치고, 성운(聲韻)과 격률(格律)을 맞춘 부(賦)를 지을 때 초에 눈금을 그어서 그곳까지 타는 동안에 완성하여 장로(長老)들이 모두 훌륭한 그릇이라고 여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글공부를 버리고 협기(俠氣)를 숭상하였다. 30세 때인 서기 1310년에 모친이 비동(脾疼)을 앓을 때 여러 의사들이 속수무책인 것을 보고 의학(醫學)에 뜻을 두어서 처음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화제국방(和劑局方)』을 베끼며 공부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소문(素問)』을 취(取)하여 읽어서 34세 때인 1314년에는 어머니의 질병이 단계(丹溪)의 처방(處方)으로 편안해질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36세 때인 서기 1316년에 협기(俠氣)를 숭상하던 것을 버리고, 동양(東陽)의 팔화산(八華山)으로 가서 주자(朱子)의 사전지학(四傳之學)을 이어받은 허문의공(許文懿公)에게서 도학(道學) 즉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이후에 향시(鄕試)에 두 차례 응시하였으나 모두 떨어졌다. 40세 때인 1320년에 허문의공(許文懿公)의 권유도 있고 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익히는 중에도 의학(醫學)을 버리지 않고 『소문(素問)』을 조석(朝夕)으로 깊이 연구하며 의학(醫學)의 스승을 찾아 사방의 각지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찾지 못하다가, 45세 때인 1325년 여름에 진지암(陳芝岩)의 말을 통하여 나태무(羅太無)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듣고서 마침내 가서 사사(師事)하려하였지만, 처음에는 심한 꾸짖음만 5∼7차례 들으며 문전박대를 당하였는데, 그래도 떠나지않고 머물러 배회하니 3개월이 지났을 때 비로소 부드러운 낯빛으로 맞이해주어 사사(師事)할 수 있어서, 1년 반 동안 왕래하며 나태무(羅太無)가 진료하는 것을 참관하며 배웠다. 47세 때인 1327년에 나태무(羅太無)의 의학을 모두 깨우치고 향리(鄕里)로 돌아오니, 고향의 여러 의사들이 단계(丹溪)의 말을 듣고 비웃으며 배격하였지만, 오직 허문의공(許文懿公)만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질병이 마침내 낫겠구나!”라고 하였다. 여러 의사들이 10여 년 동안 치료하지 못하던 허문의공(許文懿公)의 사지말단의 질병을 단계 (丹溪)가 터득한 방법으로 치료하니 효험이 좋았다. 이에 여러 의사들 중에서 비웃고 배격하던 자들이 비로소 모두 충심으로 승복하고 입으로 칭찬하니, 수년 사이에 명성이 갑자기 드러났다. 67세 때인 1347년에 문하생(門下生)인 장익(張翼) 등의 요청(要請)에 따라 『격치여론(格致餘論)』과 『국방발휘(局方發揮)』를 저술하였고, 78세 때인 1358년 음력 6월 24일에 별세하였는데, 사후에 제자인 대원례(戴原禮)가 선생의 유고인 『금궤구현(金?鉤玄)』을 출간하였다. 대원례(戴原禮)가 명(明)나라 초기에 황실의 어의(御醫)로 명성을 크게 떨쳤기 때문에 대원례(戴原禮)의 스승인 단계(丹溪)도 이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주진형의 대표 상품